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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팔만대정경을 만나는 곳 < 해인사 >

by 무님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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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는 불심이 없는 사람도 관광지 삼아 또는 역사 탐방으로 한 번쯤 가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자 역시 불심이 아닌 역사의 흔적을 찾아간 곳이다. 유명세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라 정숙하고 경건한 이런 것을 느낄 수 없었던 곳이지만

그래도 감동만은 확실히 느끼고 갈 수 있는 곳이 해인사인 것 같다.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는 가야산 자라의 안쪽에 자리잡은 절로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되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 법계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해인사를 전부 둘러보려면 하루라는 시간이 부족하다. 산 안쪽으로 많은 절집을 가지고 있는데 가야산의 줄기 사이 사이에도 절집들까지 세어보면 손으로는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다른 절은 일주문을 지나면 모든 절을 만날 수 있지만 해인사는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에도 여러 절집을 가지고 있으며 일주문을 지나서 만나는 곳에 팔만대정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판전>을 만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 그리고 해탈문을 지나면 완전한 불법의 세계는 주·객,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옳고 그름, 나고 죽음 등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들을 초탈한 불이법문의 세계로써 삼존불을 모신 건물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이제야 많은 절집을 볼 수 있게 된다. 해인사는 오래된 사찰인 만큼 새로 지어진 절집이 많다. 필자는 늘 그렇듯이 마음 향하는 절집들을 올려 볼 생각이다.

해달문을 드러 서면 마당 한가운데 있는 절집이 <구광루>이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써 지은 것이다. 

구광루를 돌아가면 해인사의 가장 큰 절집 <대적광적>이 보인다. 대적광적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궁현당과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은 현재 강원(승가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 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 건물의 현판은 궁현당과 같이 두 개인데 그 하나는 심검당(尋劍堂)이다. 심검이라는 말은 모든 번뇌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수행의 목적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대적광전>인 큰 법당에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큰 법당의 이름은 그 안에 모신 주불에 따라 결정된다.

그 주불이 바로 그 사원의 정신적인 지주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 Vairocana에서 온 말로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 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 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아직도 많이 남은 절집들은 뒤로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장경판전>으로 향했다.

<장경판전>은 대적광전 위에는 장경판전이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깊다. 국보 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에는 사간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 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 창이 윗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안에 모셔져 있는 < 팔만대장경 >의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올 때 올리도록 하려 한다. 그만큼 대장경을 말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 역사의 한 자락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유산을 모셔놓은 장경판전은 선조들의 지혜가 한껏 담긴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 아닐까 싶다.

 

절집은 사이 사이에는 고아한 모습으로 자리잡은 석탑을 볼 수 있다. 이 석탑들은 하나 같이 많은 나이를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다.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탑은 정중탑(庭中塔)이라 한다.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기본 형식이 나타나 있고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6m로 큰 탑에 속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3층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이 있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는데, 원래는 2층 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1층이 더해졌다. 기단부는 상층 기단 양쪽에 우주(隅柱)와 장주를 하나씩 모각했으며, 탑신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전각에는 후대에 설치한 풍경(風磬)이 달려 있다. 처마 끝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 앙화, 구륜(九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1926년 6월 중수할 때 상층 기단의 석함(石函)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중수가 끝난 뒤 다시 석탑 안에 봉안했다. 석탑 앞에 놓여 있던 안상과 연화무늬가 새겨진 직사각형의 봉로석(奉爐石)은 석등(경남유형문화재 255) 앞으로 옮겨놓았다.

장경각 뒤쪽에 있는 <수미정상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높이는 약 14미터이고 8각 7층 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 석등. 바닥돌을 제외한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신라 양식인 합천 해인사 석등 등이 있다. 

 

필자가 바라본 해인사는 아름다운 절은 아니었다. 많은 절집으로 둘러보는 곳곳이 막혀 있어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즈넉함을 느꼈던 것도 아니고 오래된 고찰이지만 영험함을 느껴던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의 큰 줄기였던 해인사는 이런 소소한 감정들을 토로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절이라 생각했다. 시대의 아픔들을 간직하고 그것을 이겨내면 지금껏 한 자리에서 역사를 써 나가는 절, 아름다움을 논하기엔 곳곳에 있는 흔적들은 역사의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많은 고즈넉함을 느끼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보아야 할 절, <해인사>는 그런 절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이가 내 아이의 아이가 찾아보고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을 잊지 않아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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