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돈은 조선 전기의 문신. 좌리공신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성절사,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1459년(세조 5) 형조좌랑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통례문판관에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467년(세조 13) 호군(護軍)으로 부산포에서 유구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집의로 임명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호전(戶典) 중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불법한 홍윤성(洪潤成)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1468년(세조 14)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일본통신사로 파견되어 예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469년(예종 1) 우윤이 되고, 경회루에서 행한 부시(賦詩)에서 1등을 하였다.
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고, 이어 수사헌부대사헌(守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다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교정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가 이듬 해 좌리공신(佐里功臣) 4등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동지관사(同知館事)로서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
1472년광원군(廣原君) 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듬 해 호조참판가 되었다. 1474년(성종 5)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또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흥천사(興天寺) 기우제(祈雨祭)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중궁 책봉에 대한 주본(奏本)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8년 병조참판, 이듬 해 예조참판(禮曺參判),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겸 영흥부윤(永興府尹)이 되었다. 1481년 이조참판(吏曺參判)·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또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강목신증(綱目新增)』을 찬하였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 해 평안도진휼사(平安道賑恤使)가 되었다. 또,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1486년(성종 17) 전라도진휼사(全羅道賑恤使), 이듬 해 한성부판윤,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 1488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1490년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이듬 해 병조판서로서 오래도록 전형(銓衡)을 잡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1492년 행 경상도관찰사(行慶尙道觀察使)가 되어 『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 및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제(太平通載)』 등의 책을 간행해 바치고, 이듬 해 행 이조판서(行吏曺判書)가 되었다.
1494년노사신 등과 『계몽의두(啓蒙議頭)』 등의 책과 『대명률(大明律)』을 대조해 미비한 것을 참작해 쓸 것을 청하고, 이어 사직기도행향사(社稷祈禱行香使)로서 사직제를 주관하였다. 성종의 국상 때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산릉간심사(山陵看審事)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지관사(知館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다. 이듬 해 좌찬성이 되었다.
전례에 밝고 사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었다 한다.
하지만 1498년(연산군 4)『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서,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빌미를 일부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극돈은 어세겸(魚世謙)·유순(柳順)·윤효순(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화 뒤 잠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1501년(연산군 7)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1503년에 69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이극돈(李克墩)묘가 있다
묘는 정경부인 안동권씨(貞敬夫人 安東權氏)와의 사각형의 쌍분이며 앞쪽 아래에 높이 30cm, 너비 150cm의 장대석(長臺石) 3개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있다. 봉분 가운데는 묘표(墓表), 장명등(長明燈)과 각 봉분의 가운데로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왼쪽과 오른쪽으로는 관을 쓴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관을 쓴 문인석은 턱수염의 표현이 특이하고 두 손은 홀(笏)을 마주잡고 있으며 5단의 옷주름과 관복을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묘표는 봉분의 가운데 있으며 비좌(碑座), 비신(碑身), 화관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15대손 이창래(李昌來)가 짓고 14대손 이영휘(李永輝)가 쓴 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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