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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6대 왕 - 인조

by 무님 2020.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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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거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였다. 인조는 계획이 여러 사람들 입을 통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조바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인조는 예정일 보다 일찍 반정을 일으켰고 이런 탓에 치밀하지도 못한 느낌이지만, 군왕이었던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1623년 김류()·김자점()·이귀()·이괄() 등 서인(西)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으므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은연중 친명적()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한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에 항복, 군신()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西)·청서(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이()·이원익()이 주장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인 중강()·회령()·경흥() 등지에 개시()하여 그들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였다.

'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예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것은 만백성에게 충격을 주었다. 장남 소현세자와 둘째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수도인 만주의 심양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보다 나이 어린 계비는 후일 복상과 예송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에 인조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조정에 파견하였다.

1644년 11월 볼모에서 석방된 소현세자가 귀국하였으나 친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그를 독살한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賜死)하였다.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적 간행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하였다.

1649년 (인조 27년) 손자 연(棩)(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649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을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 효종 앞에서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와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 왕릉·왕비릉. 사적. 있다. 처음 인열왕후 상() 때 능의 터로 파주시 북운천리로 정하고 인조도 이 곳에 장사하였는데, 1731년(영조 7) 사갈(: 뱀과 전갈 등 사람이 몹시 싫어하는 동물)이 낭자하게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위치로 옮겨 합장하였다.

석물은 봉분 아래 병석()을 두르고 밖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능 앞에 석상 2좌를 배치하여 2위()임을 표시하였다. 합장 때 옛 능의 석물을 옮겨다 썼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 1원,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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