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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 실록

by 무님 2020.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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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은 조선왕조 제11대 왕 중종의 재위기간 1506년 10월에서 1544년 11월에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그러나 제105권에는 인종이 즉위한 1544년 11월 16일부터 12월 말일까지의 기사가 합편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이며, 모두 105권 102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준종실록>은 인종 때에 그 쳔찬이 계획되었으나. 당시 대, 소윤 정쟁이 격렬하였고 인종이 재위 9개우러 만에 세상을 떠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뒤에도 을사사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바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명종원년인 1546년 가을에 비로소 춘추관에 실록청을 두고, <인종실록>과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명종 5년인 1550년 10월, 시작한 지 5년 만에 재위 39년간의 기록을 실은 1백5권이 완성되어 각 사고에 봉인되었다.

<중종실록>의 기년법은 역대 실록의 원칙인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세조와 같이 즉위년친원법을 채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종도 세조와 같이 폐위된 임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중종실록>의 내용

중종은 1488년에 태어나 1544년에 죽었다.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며, 성종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1494년 진성대군으로 봉해졌고, 1506년 9월 2일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각종 폐습을 혁파하고, 옛법도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종은 유능한 유학자들을 조정에 등용하여 우대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 사림파의 소장 학자들이 크게 등용되었다. 중종 대는 크고 작은 정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이듬해의 박경의 옥과 이과의 옥사를 비롯하여 왕 14년인 1519년에는 이른바 기묘사화가 발생했고, 16년인 1521년에는 송사련의 고변, 22년인 1527년에는 동궁 작서의 변 등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기묘사화는 연산조의 무오, 갑자 양대 사화에 이어 일어난 가장 튼 정치적 사건이었다.

동궁 작서의 변은 중종 22년에 세자로 있던 인종의 생일날 불에 탄 쥐가 동궁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이것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세자를 저주한 것으로서 그 혐의는 세자의 서형인 복성군과 그 어머니 경빈 박씨에게로 돌아가 결국 사사되었다. 그 뒤에는 또 세자와 배가 다른 아우인 명종을 둘러싸고 그 외척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윤. 소윤의 정쟁이다. 이 대.소윤의 대립은 후일 을사사화를 빚게 되었다. 중종대에는 많은 문화적 업적이 있었다. 중종 4년인 1509년에는 성종 대에 이미 완성 반포되었던 <경국대전>과 새로 편성한 <대전속록>이 출판되고, 37년인 1542년에는 <속록>이후의 수교외 승전을 정리하고, 이듬해에는 <대전후속록>을 완성하였다.

 

 

 

중종의 태실이야기 

 

제 11대 임금인 중종(1506~1544)의 태실은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 310번지에 있다. 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

중종대왕 태왕태봉

 

중종 태실에는 중앙에 작은 태실비(아기비)가 있다. 이것은 중종의 왕자 시절에 세워진 비이다. 비의 지붕 돌은 연잎이 새겨진 보주를 얹엇고, 비신에는 태실의 주인공과 태를 묻은 날짜를 앞뒤로 음각했다.

그리고 임금으로 즉위한 뒤의 태실비는 작은 태실비 옆쪽에 세워져 있다. 지붕돌에 용 두마리를 조각하였는데, 비를 받치는 귀부는 마모가 심하고 머리는 잘려져 없어졌다. 이곳 중종 태실은 1492년 중종의 나이 5살 때 세워졌다가 중종이 즉위한 뒤 임금의 태실로서 그 모습을 갖추었다.

 

 

중종 태실지

 

1929년 중종의 어태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진 뒤 가평에 남은 석조물은 흩어져 있었다. 1982년 12월 이곳의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지름 100cm, 높이 120cm의 태항아리를 발견해 태봉이었음이 밝혀졌다. 부근에는 파손된 거북비석을 비롯해 난간석 등이 흩어져 있었다. 198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 복원됐다.

현재 복원된 태실은 지하 석함으로 매몰되야 할것이 지상으로 올려져 사라진 개첨석과 중동석을 대신하고 있다. 때문에 외형상으로는 복원 정비가 잘못된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실의 석물 중에 팔각첨석이 없다. 그리고 아기비의 앞면은 정으로 모두 쪼아져 있다. 가봉 태실비의 귀부에는 머리 부분이 파괴돼 있다. 비신의 중앙 부분은 절단되어 석재로 복원 했다.

 

중종 태실 석함

 

태실비의 명문을 보면

아기태실비 - [前面 - oooo阿只氏胎室, 後面 :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

아기태실비 - [전면 - oooo아기씨태실, 후면 : 홍치오년구월초칠일해시립]

가봉태실비 - [前面 - 主ooo胎裝, 後面 : 正德十年二月日立]

가봉태실비 - [전면 - 주ooo태장, 후면 : 정덕십년이월일립]

으로 아기태실의 조성은 성종 23년에 이루어지고, 태실의 가봉은 중종 10년 (1515)으로 당시의 가평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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