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중종, 기묘사화 '선비들의 죽음'

by 무님 2020. 4. 12.
728x90

기묘사화는 네 개의 사화 중에서 ‘선비들의 피화’라는 의미에 가장 적합한 사건일 것이다. 그것은 삼사의 영향력이 대단히 팽창했을 때 국왕과 일부 대신이 그 관서를 이끈 주요 인물들을 전격적으로 숙청한 사건이었다. 1519년(중종 14)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삼사를 장악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중종의 확고한 신임이었다. 특히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그야말로 물과 고기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각별했다.

등용된 지 2년 반만에 당상관에 오르고(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6월에 벼슬을 시작해 1517년 윤12월 직제학이 되었다), 짧게는 사흘부터 보통 서너 달만에 요직에서 요직으로 옮겨간 조광조의 관력은 그런 총애의 가장 객관적인 증거일 것이다(1513년 5월에는 사흘 만에[2일~5일] 동부승지에서 부제학으로 옮겼다).

[중종실록]은 그 국왕과 신하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조광조가 말하자 중종은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서로 진정으로 간절히 논설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환관이 촛불을 들고 가자 그제야 그만 두었다(1519년 7월 21일).”

사화를 넉 달 앞둔 시점까지도 이렇게 친밀했던 그들의 관계는 그러나 급격히 허물어졌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이 일거에 숙청된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당파성과 급진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묘사림을 둘러싼 객관적 환경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문제들은 대부분 10년 넘게 누적된 것이었고, 그 규모와 중대성이 특별했다.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들은 상당히 젊었고, 관직의 경험이 많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정을 운영하는 대신들과 친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런 약점을 덮어줄 가장 중요한 강점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바로 국왕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이었다. 이런 객관적 상황, 즉 젊고 열의에 찬 관원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거대하고 민감한 문제들을 대신들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한 채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에만 의존해 단시간에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던 상황은, 기묘사림의 정치적 행보와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실각에 이르는 거의 모든 원인을 파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사화를 촉발시킨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현량과()의 실시와 정국공신의 삭훈(- 공적을 깎음)으로 지적된다. 이것은 기묘사림의 핵심적 과업이기도 했다. 먼저 현량과는 사장()에만 치중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한 뒤 대책()만 시험해 선발하는 제도였다.
현량과는 1519년 4월 13일에 시행되어 김식 등 28명이 선발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합격자가 모두 기묘사림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결과는, 선발된 인물들의 실제 수준이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기묘사림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조선 최초의 천거과로 선발된 ‘현량한’ 인물이 모두 자파()라는 사실은 그들이 매우 당파적인 집단이라는 혐의를 짙게 만들었다.

현량과와 관련해서 주목할 또 다른 사실은 그 급제자의 사회적 배경이다. 통설에 따르면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그들의 배경은 예상과는 상당히 어긋난다. 28명 중 23명(82%)이 기존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고, 21명(75%)은 지방이 아닌 기호() 출신이었던 것이다. 앞서 조광조가 개국공신의 후예로 한양에서 태어난 것과 비슷한 이런 사실은 사림파를 지방의 신흥 가문 출신으로 설정하고 있는 통설의 내용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알려준다.

현량과가 자파의 세력을 보강하려는 조처였다면, 정국공신 삭훈은 기존 세력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는 급진적 시책이었다. 대사헌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을 중심으로 한 삼사는 10월 25일에 그 문제를 제기했다. 국왕과 대신은 삭훈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삼사는 3고(- 23~01시)까지 반복해서 극력 논의했고, 조광조는 귀양을 가거나 죽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으니 조속히 윤허해 달라고 주청했다.

결국 기묘사림은 보름 뒤인 11월 11일 국왕의 윤허를 얻어냄으로써 정국공신 중 76명(72%)의 삭훈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 나흘 뒤 전격적으로 사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묘사림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 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 공훈을 기록한 명부)에서 삭제 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 홍씨를 이용해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 : )’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 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김전()·남곤·고형산()·심정 등은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년 11월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이 때는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밤 2고(20~22시)에 전격적으로 일어났다. 정국공신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은 현량과로 기묘사림이 대거 진출하고 삭훈으로 자신들의 현실적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불안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신하들의 심상치 않은 동향은 현실적 반란으로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신하들의 반정으로 추대된 경험을 가진 중종에게 이것은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불안의 원인을 제거해 국정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필요에 공감했다. 그런 합의에 따라 국왕은 사화를 즉시 재가했다.

중종은 밀지를 내려 홍경주·남곤·김전·정광필 등 주요 대신을 비밀스럽게 불렀고,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을 전격적으로 하옥시켰다. 그들의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즉각 유배되었고(16일)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21일).

정광필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화인의 형량은 한 달만에 확정되었다.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외딴 섬이나 변방에 안치()되었다(12월 16일). 조광조에 동정적이던 정광필과 김전은 각각 영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남곤과 이유청이 좌의정과 우의정에 발탁됨으로써 조정도 새롭게 구성되었다(17일). 이로써 사화는 일단락되었다.

 

 

728x90

'조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종시대 삼포왜란 일어나다  (0) 2020.04.13
인종을 저주하다 '작서의 변'  (0) 2020.04.13
중종 실록  (0) 2020.04.10
연산군시대 사간 이극돈  (0) 2020.04.10
조선 16대 왕 - 인조  (0) 2020.04.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