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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동구릉 2편 <현릉과 건원릉>

by 무님 2020.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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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님의 여행 이야기 <동구릉2편>을 소개합니다. 동구릉 2편에서는 조선 왕릉의 석물,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든 현릉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소개하려 한다.

 

태조 이성계의 능 <건원릉>

 

 

조선 왕릉의 석물은 주로 능침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석물이 피장자를 위해 만들어진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병풍석>은 다른 나라의 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능묘 조강의 구조로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실제적으로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병풍석 중앙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기고, 모서리 우석에는 영탁을 조각하며 모란, 구름 등이 장식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봉분을 보호하고 상징적으로는 수호의 역할을 한다.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봉분을 울타리처럼 두르거나 병풍석 없이 봉분을 두르고 있는 석물로 우리나라 능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혼유석과 고석>은 영혼이 나와서 몰도록 설치한 돌을 의미한다. 혼유석은 능의 정면에 상의 형태로 놓인 돌로 원래 명칭은 석상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둥근 북 모양의 고석은 '족석''부석'으로 불린다. 고석의 높이는 50cm 정도이고 둥근 형태이며 사면에는 귀면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물고기 머리에 귀신 얼굴'이라는 사적적 의미로 잡귀로부터 혼유석을 지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봉분 주변에는 동물 조각이 둘러져 있는데 정면을 제외한 삼면에 석호와 석양이 2쌍씩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석양과 석호를 번갈아 배치한 것은 양은 온순함을 호랑이는 사나움을 강조하며, 또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망주석고 세호>는 혼유석 좌우에 촛대처럼 서 있는 한쌍의 돌기둥으로 석망주, 망두석, 촛대석, 화표석,전죽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망주석의 가운데 기둥에는 세호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으로 새긴 목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장명등>은 중계의 가운데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저 놓았으며 등불을 밝히는 석등으로 조선 왕릉에서만 등장하는 석물이다. <문석인>은 머리에 쓰는 복두, 포로 불리는 옷, 허리띠인 대, 손에 드는 홀, 가죽신인 화를 갖춘 공복을 착용한 백관의 모습니다. <무석인>은 능침의 하계에 있으며 무석인 한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있다. <석마>는 왕의 신하의 소유물로 문무석의 뒤에 약간 남쪽으로 한필씩 서 있다. 

 

 

 

 

 

효명세자의 능인 수릉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현릉이 나온다. <현릉>은 조선의 5대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를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를 조성한 동원이강릉 형태이다. 정자각에서 왼쪽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지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건원릉 남쪽에 조성하였다.

문종 이향은 세종의 첫째 아들로 아버지를 닮아 학문을 좋아했고, 정치 실무를 익히며 한글 창제와 측우기 창안 등 세종의 후반기 업적을 담당하였다. 세종 재위 말년 대리청정을 하며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거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인 39세에 승하하게 된다.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산후병으로 24세에 세상을 떴으며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 되었다.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건원릉의 봉분은 다른 왕릉과 달리 억새풀이 덮여 있는데 이는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에 따라 청완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건원릉에  정자각과 비각 안의 신도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408년 5월 24일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안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7월 말을 기하여 신릉 공사를 시작한 후 9월 9일에 발안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길 원하여 능인 정릉에 본인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고령의 뛰어난 무장이었다. 1392년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재위 기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 왕국의 기틀을 마령하였다. 태조는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 하였으며 사대 정치를 하였고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정종에게 양위한다. 태종은 즉위 후에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교에 정진하였다. 1408년 태종 8년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릉의 모습은 똑같은 듯 달랐다. 보고 돌아서고 다시 만나는 왕릉의 모습은 같은 건축물과 같은 릉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설명을 하나하나 읽으며 다시 바라보게 되는 왕릉의 모습은 같을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왕의 살아 생전의 업적과 사연과 삶의 이야기를 알고 왕릉의 모습을 바라보면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수릉의 주인이 효명세자라는 것을 알고 바라보니 애틋하고 애잔하며 왠지 모를 그리움이 사무치고, 현릉의 주인인 문종의 능을 바라보면 왕릉에서 조차 인품이 넘치고 올바름이 묻어나고 건원릉의 주인인 태조의 능을 바라보면 강력한 의지와 강함이 묻어났다. 필자는 오늘 문종과 태조를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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