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왕비 2명, 후궁 4명, 자녀 8남 5녀 두었다. 그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둘째아들 영안대군이 조선2대 왕인 정종이며, 다섯째 아들 정안대군이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된다. 하지만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세자에 올렸던건 그가 사랑했던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의안대군이었다. 하지만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태종 이방원. 정안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신의왕후 한씨는 1337년 출생하여 1391년에 사망했다.
태조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으로 밀부사 증영문하부사 한경과 신씨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직 벼슬하지 못하던 때에 결혼하여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 55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의 여서 명의 아들과 딸 경신. 경선이 있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되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뒤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가 묻힌 제릉은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산 또는 신천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강윤성은 찬성사 벼슬을 지냈다. 그녀는 신의왕수 한씨와는 달리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고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 이후에도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가 낳은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강씨 소생으로 방원에게 죽은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자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뒤에 태종은 몇 차례에 걸쳐 이장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페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 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의해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었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2동에 있다.
진안대군 방우는 1354년에 태어나 1393년에 죽었다
그는 1354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천성사 지윤이 딸과 결혼했다. 일찍이 예의판서를 역임하였고 1388년에 밀직부사로 밀직사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창왕의 등극을 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진안군으로 책봉되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으로 받았다. 그러나 병으로 이듬해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익의대군 방의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익안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동생 방원을 도운 공로로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정종이 즉위한 뒤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400년 아우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관직을 사퇴하고 방원을 도왔다. 그는 태종이 즉위하자 1400년에 익안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404년 세상을 떠났다
회안대군 방간은 1364년에 태어나 1421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판서찬성사 미선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뒤 2명의 아내를 더 두었다. 그는 조선이 개국되자 회안군에 봉해졌으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되었다. 또한 정종이 즉위하자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들을 관장했으며, 1400년 1월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 을 일으켜 방원과 맞섰으나 방원의 군대에 패배한 뒤로 즉을 때까지 유배지를 전전했다. 그는 야심이 대단했고, 성격도 괄괄했다. 그는 박포로부터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자 곧장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여 홍주로 귀양을 갔고, 1421년 58세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안대군 방번은 1381년에 태어나 1398년에 죽었다. 그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귀의군 왕우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려왕조로부터 고공좌랑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조선 개국 후에느 무안군에 책봉되어 의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3년 13세로 좌군절제사로 제수되었으며, 한때 세자로 내정되기도 했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반대해서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1398년 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석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18세였다.
의안대군 방석은 1382년에 태어나서 1398년에 죽었다. 그는 방번의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현빈 유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폐출되자 춘주관 대제학 심효생의 딸과 재혼했다. 조선 개국 원년에 배극렴 등이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삼을 것을 주장했으나, 이때 그의 어머니 한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의 반대로 방번의 세자 책봉은 무산되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해 세자로서의 수업을 익히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강씨가 죽고 태조가 병석에 눕게 되자 이 틈을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보냈다가 죽였고, 방번도 죽임을 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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