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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정도전 태조 이성계와 만나다

by 무님 2020.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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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조선 건국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정도전(,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정도전의 자는 종지이고, 호는 삼봉이며 안동 보오하 출신으로 형부상서 정윤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공민와 9년에 19세로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점차로 올라 통례문 지후에 이르렀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을 키웠다.

 

공민왕

고려시대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왕이기도 하다. [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고려왕 ]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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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정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삼봉 정도전

 

정도전은 도량이 좁고 남을 시기하는 버릇이 있고 겁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해치려 하였고 옛날 품었던 감정을 잊지 않고 보복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화를 보면 알수 있다

 

'정도전은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정몽주, 이숭인 등과 친구로 사귀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권근과 친하기 위해 세 사람을 헐뜯었다. 정도전의 외할아버지의 장인인 김전이 일찍이 중노릇을 할때 수이라는 종의 아내와 간통해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었다. 우현보의 자손들이 김전과 인천관계였으므로 자신이 맨 첫음 벼슬을 하게 될 때 임명장이 늦어지는 이유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비리를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들에게 앙심을 품게된다. 그는 우현보의 자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죄를 씌어 죽여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임을 믿고 세자 방석을 세우는데 적극 협조하였으며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 하려고도 하였다. 이런 정도전을 꽤심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왕자의난>때 일이였다

 

'그들이 정도전의 첩의 집을 에워쌌다. 이때 집의 종들은 모두 자고 있었으며 정도전과 남은은 등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숙번이 불화살을 날려 집에 불이 붙자 삽시간에 집은 불길에 휩싸였다. 이때 정도전, 남은은 도망쳤고 심효생 등은 잡혀 죽었다. 정도전은 이웃해 있는 민부의 집에 도망쳤다. 정안군은 군사들에게 샅샅이 뒤져 그를 찾게 했다. 마침내 군사들에 의해 정도전은 붙잡혔다. 그는 이때 손에 작은 칼을 들고 있었으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그는 방원 앞에 끌려나와  " 공이 나를 살려 주시오. "

그러자 정안군은 그에게   "  무엇아 부족해서 우리 형제들을 죽이려 했느냐? "

고 말하고 그를 목을 베어 죽이라고 명령 햐였다. 정도전에게 아들 넷이 있었는데 정유와 정영은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정담은 자살했다. 그리고 남은을 비롯한 정도전의 일당을 찾아내어 죽였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잡아 멀리 귀양보내는 척하고는 도중에 죽이고 그의 형인 방번도 죽였다.'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를 박람해 의론()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 )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학자지남도()』·『심문천답()』(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이요 정학()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라든가, 『자치통감강목()』,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향약()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의 공리적 사상()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그의 경세론()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의 제도에서 부병제()·군현제(, )·부세제()·서리제()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나 양천()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상()·염()·광()·산장()·수량()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감사요약()』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오행진출기도()』·『강무도()』·『진법()』 등이 있다. 의서()로는 『진맥도결()』, 역산서()로서 『태을72국도()』와 『상명태을제산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정동방곡()>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과 『금남잡제()』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이다.

 

 

정도전 그의 죽음은 비참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이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으며 위대하 개혁가 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남긴 많은 업적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정도전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유능하고 추진력 있는 정치가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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