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응 왕비 1명과 후궁 9명 자녀가 17남 8녀가 있어다고 한다. 재위기간은 2년정도 되지만 그는 상왕으로 물러 난 19년동안 권력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정종은 아내 정안왕후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안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고려 말에도 아내 정안왕후 김씨와의 젊은 시절부터의 정 때문에 아내를 더 얻을 수 없다 하여 평생 해로한 애처가이기도 하다. 상왕으로 물러난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경왕후에게 후궁 관할권을 빼앗고 후궁을 더 들인다며 수선을 떨자, 상왕 정종이 "금상(현임, 즉 재위 중인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말해 태종이 거창하게 하려던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이기도 했다. 이건 태종이 뭘 하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유일하게 태종에게 한소리 한 것이라고 한다.(출처: 《태종실록》 권3 2년 2월 11일 갑자 3번째 기사. # 집안 어른으로서 그냥 보고만 있진 못했던 모양. 물론 거창하게 행사까지 하려던 걸 안 했을 뿐이지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후궁을 9명까지 꽉 채워서 다 들였다.
후일 정안왕후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갑자기 먼저 간 아내가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태종실록》 권24 12년 8월 15일 정묘 2번째 기사. #
허나 아내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첩실 소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상당히 많았다. 지금과 당시의 결혼관이 상당히 다른 면이 있어 그런 것도 있지만, 유교관에서 최고의 불효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게 금슬 좋은데 자식을 못 보는 것을 왕비가 불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11] 여하튼 자녀복 많은 조선 왕조 군주 랭킹 4위로 15남[12] 8녀(23명). 이들은 대체로 행실이 엉망이라 이후 세종대왕 시대에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골칫거리가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정종에게 적자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종에게 정통성이 있는 적자가 있었다면, 피바람이 한 번 더 휘몰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야사에는 모두 출가시켜서 승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종의 아들을 사칭한(친아들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승려의 이야기가 후세에 들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 야사를 참조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종에게는 기매라는 이름의 기생 출신 첩이 있었는데, 바람기가 대단해서 많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아들도 낳았지만 아버지가 의심스러워서 정종은 기매가 낳은 아들을 아들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기매가 가짜 내시와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이 났는데, 원칙대로라면 이는 처형감. 태종과 중신들은 가짜 내시와 기매를 처형하려 했으나, 정종은 직접 태종에게 부탁하여 기매를 살려주었다. 기매는 끝까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정종의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인정하지 않고, 대신 죽을 때까지 기매 모자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 사후 기매의 아들은 '지운'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지만, 승려의 모습으로 왕자 대접을 받고 돌아다니며 권세를 누렸는데, 왕족 사칭죄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상왕이 된 태종과 국왕 세종대왕은 일단 지운을 체포했는데, 태종과 세종은 지운이 정종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심증적으로는 정종의 아들이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지운에게 '왕족에 준하는 의식을 공급할 테니, 절대 왕자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지운은 이 명을 듣지 않고 계속 문제 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세종 6년(1424)에 참수되고 만다.
바로 아래에 설명했듯이 '원자'로 불렸다는 불노(佛奴)는 실록에 정종의 친아들이 아니라 첩 유씨가 다른 사람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됐다. 불노도 지운처럼 자기가 상왕(정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결코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불노는 계속 정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가 공주에 안치됐다.[13]
그 외에 서자로 5남 선성군이 있는데, 첫째 부인이 바로 정몽주의 손녀인 오천군부인이다.
정안왕후 김씨는 1355년에 태어나 1412년에 죽었다. 정안왕후 김씨는 경주 김씨 천서의 딸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영안대군 정종이 세자에 오르자, 덕빈에 책봉되었고, 그 해 9월에 정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비에 책봉되었다. 1400년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순덕왕대비의 존호를 받았고, 1412년에 58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소생은 없었다. 전해 오는 야사에는 태종에게 왕위를 내주라고 권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그녀는 정종이 왕위에 더 있다가는 방원에게 죽 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종에게 물어날 것을 적극적으로 권고했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동생 방원을 몹시 두려워했는데, 아는 실권이 없는 왕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었다. 능은 정종과 같은 곳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후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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