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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의 가족관계

by 무님 2020.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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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 왕자의 난을 두번이나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하고 둘째형 정종을 왕위에 올리지만 2년 뒤엔 정종을 상왕에 앉히고 왕이 되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왕비 1명과 후궁 9명 자녀가 12남 17녀가 있었다. 그는 많은 자식 중에 세째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

 

태종 이방원의 가족관계

원경왕후 민씨는 1365년 태어나서 1420년에 죽었다. 원경왕후 민씨의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 조선왕조가 창건되자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1400년 2월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자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 해 11월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 위인 민씨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태조가 병이 위중하여 여러 왕자들과 함께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종으로 하여금 불러내어 정도전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단숨에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군을 혁파하고 그들의 군장비를 모두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이 거느린 구사에게 내어주어 싸우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후궁 문제로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틐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마침내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은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수 민씨는 1402년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는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현제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양녕대군은 1394년에 태어나서 1462년에 죽었다. 1394년 태조 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큰알들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산 김씨 한로의 딸이었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종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을 몰래 빠져 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또한 그는 여자에 빠져 태종과 심각하게 대림하기도 했는데,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하는가 하면, 매형의 첩이었던 기생과 통정을 하기도 했다. 특히 애첩 어리 문제는 태종과의 관계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마침내 1418년 그는 세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1461년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강정이다.

 

효령대군은 1396년에 태어나 1486년에 죽었다. 그는 1396년 태조 5년에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6남1녀, 첩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한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물려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절을 찾아가서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는 1407년 태종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종되었다. 그는 불교에 전념하여 1435년 세종에게 회암사 중수을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국문으로 번역했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다. 효령은 성격이 유순하고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왕들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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