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왕이였다. 그를 평할때면 '피의군주'라 불리울 정도이니 그가 왕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 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개인적인 인생사를 보면 불행할 따름이였다. 그렇다고 그를 동정 할 수는 없다. 세조 자신의 업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조도 정작 자기 가족과 아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남자였다고 한다. 세조는 어머니 소현왕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소현왕후 말년에 병으로 자주 피접을 갔는데, 마지막으로 요양한 곳이 바로 둘째 아들인 세조의 개인 사저였을 정도였다. 또한 세조는 무척 애처가였다고 한다. 세조는 왕이 되서도 후궁을 한명밖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는 아내 정희왕후를 매우 사랑하였는데 왕이 후사를 생산해야 한다는 이유로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등쌀에 못이겨 후궁을 두었지만 후궁에게선 후사를 두지 않기도 했다. 세조의 나들이 길에는 정희왕후와 함께 했다는기록이 <세조실록>에 남아있다고 하니 그의 아내 사랑은 대단한 것이였다.
세조는 막강한 왕권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였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오른 자리이지만 그가 이룬 업적을 생각해 보면 왕으로써는 부족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일 먼저 시행한 제도가 <6조직계제>였다.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했던 제도인 6조직계제를 세조 역시 그래도 모방한 것이다. 6조직계제는 왕의 명령을 여섯 장관에게 직접 내리고, 보고도 여섯 장과이 왕에게 직접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의정부의 역활을 약화시키기 위한 왕권강화정책이였다
세조는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불명예를 업고 왕위에 오른 왕이였다. 그로 인해 세조는 신하들의 지탄을 받아야만 했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벌어지고 하였다 당시 각 지방에 지방 민회를 담당하는 <유향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각 지방 민회 소속 영감들이 모여 사또를 보좌하고 감찰하는 역활을 한 장소였다 세조는 왕의 분신인 수령의 권한을 넘보는 곳이라는 이유로 이곳을 폐지해버린다.
또한 세종때 만들어진 집현전을 폐지하는데 자신을 공격하려드는 것을 못마땅히 여김이였다.
세조의 위대한 업적이라면 <경국대전>을 편찬한 것이였다. 경국대전의 조선의 법전이라 할 수 있다.
세조 이전에도 <조선경국전>,<경제육전>,<속육전> 등의 법전이 있었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조선만의 법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경국대전>은 성종에 의해 완성이 된다.
마지막으로 세조 때 재정을 담당하는 법전 <호전>과 형벌을 담당하는 법전<형전>도 완성이 된다.
세조의 이야기를 접하게 될 때면 많은 생각이 들게 된다. 과연 그를 <피의 군주>, <폭군>으로만 평할수 있을까? 만약 그가 세종의 장남으로 태어났었다면~~~ 만약 그가 어린조카 단종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다면~~~ 그는 역사에 어떻한 인물을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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