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비명횡사를 하자 세자에 자린에 오른다. 세조가 사망하고 성인이 되기전인 예종은 어머니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어 승하하기까지의 재위기간은 1년 3개월이 된다
아버지 세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려 했던 예종은 어지러운 시국에서도 뜻을 펼치려 애를 썼으나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아버지 세조 때 일어난 계유난 이후 형성된 원훈세력(구공신)과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세력 신공신의 갈등으로 어지러웠던 시국이였으며 세조가 죽기전 어린왕을 걱정하 여 시행한 원상제 실시로 인해 신하의 권력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원상제란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제상들이 임금을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이시애의 난으로 세력을 키우게 된 신공신의 세력의 중심엔 남이가 있었다.
남이는 16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26세에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다음 해에 병조판서가 되는 등 파격적인 인사로 승승장구하던 인물이다. 당시 과거 급제의 평균 나이가 30세 전후였으니 16세의 급제한 남이는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있다.
게다가 그의 할머니는 조선 제 3대 임금인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고, 장인은 좌의정까지 올랐던 권근이였다. 집안 좋고 시력까지 출중한 인물이였던 것이다. 남이는 세조가 집권하던 시기에 무인으로 활약하며 세조 13년에 발발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세조가 승하하기 13일 전에 파격적으로 병조판서에 임명된다. 하지만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실각하게 되는데 이는 유자과이란 인물이 남이의 역모 사실을 고발했기 때문이였다.
'남이가 궁궐에서 유자광과 같이 숙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긴 꼬리를 드리운 혜성이 나타났다. 이때 남이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오려는 징조네" 하며 말하였다. 유자광은 이 사실을 그대로 전하였고 남이는 그저 툭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역모를 꾀한 것이 되어 고문을 받게 된다. 남이는 이를 부인하였지만 혹독한 고문에 결국 자백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사흘 수에 형을 받고 죽게된다.
남이 장군의 묘는 춘천 남이섬과 경기도 화상 2곳에 있다고 하다. 남이섬의 묘가 가묘라는 말도 있고 화성의 묘는 추모비라고 하는데 이는 남이장군이 거열형인 사지가 찢어 죽이는 형으로 시신이 여러 갈래도 나뉘어 그렇다고 한다.
이때 '남이의 옥'이라 하여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세력들이 제거 되고 구공신들이 집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토록 신하들간의 세력 다툼이 심하였던 시기에도 예종은 아버지 세조처럼 왕권을 강화하여 노력하였지만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예종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예종에게는 고질병으로 발에 생기는 병인 족질이 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던 기록에는 족질이 죽을 만큼 심각했던 건 아닌 걸로 보인다.
"내가 족질로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내가 무사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는 재예를 시험하되, 한 나라와 당나라 이래의 고사로써 책문 하려고 하는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실록에서는 예종이 죽음이 매우 갑작스러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하들 역시 당황했던 걸로 보이며, 예종의 죽음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 한걸로 보인다. 이는 예종의 죽음 이후 신숙주와 대비의 대화에서 볼 수있다.
조금 지나서 신숙주가 아뢰기를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 옥체가 미령하다고 들었을 뿐,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 하였습니다."하니
대비가 이르기를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하였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
이 때문에 예종은 독살설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실록에는 예족의 독살설에 대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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