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은 조선 7대 세조의 둘째아들로 출생했다.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세자가 장성한 후에 태어났기에 예종은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맏형인 의경세자가 요절을 하게 되므로 세자에 자리에 오른게 된 것이다. 예종은 성인이 되기 전인 19세에 왕위에 올랐기에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1468년, 19세의 나이였다. 예종은 세자였던 1460년에 11세의 나이로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씨를 아내로 맞이한다. 한명회의 딸 한씨의 나이 16세였다. 그리고 혼인을 한 다음해인 1461녕에 아들 인성대군을 낳게 된다. 즉, 12세의 소년이 아버지가 된 것이다. 조선 왕조의 가장 나이에 아버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낳은 장순왕후는 산후병으로 사망을 하고 아들인 의성대군마저 3세의 어린 나이로 풍질을 앓다가 죽게 된다.
예종의 재위기간은 1년 3개월이였다 게다가 세조 때 일어난 계우정난 이후 형성된 원훈세력(구공신)과 이시애의 난 이후에 성장한 세력 신공신의 갈등이 심해져 나라가 어지러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말년인 세조 13년인 1467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이다.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함경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대신 한양 출시능로 대체했다. 그리고 지금의 주민등록증인 호패법을 강화하여 지방민에 사는 지주들에게 사또도 못하게하고 한양으로 이사도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시애는 함경도 출신의 유력자였다. 당연히 세조의 이러한 지방 압박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시애가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이시애는 세조의 측근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라는 소문도 퍼뜨린다. 이를 듣고 놀란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옥에 가두었고 이런 가운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 바로 왕족 출신의 구성군과 젊은 군인 출신인 남이였다.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젊은 세력들을 신공신리라 불렀으며 한명회와 신숙주 등 기존의 세조의 측근이었던 세력을 구공신이라 부른다
세조 말년 구공신과 신공신의 갈등은 심했다. 그러한 갈등을 조정하고 어린 왕 예종을 염려한 세조가 원상제를 실시하게 된다. 원상제란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재상들이 임금을 보좌하는 것인데 당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예종을 보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신하의 권력을 강해지게 만들었다. 왕권의 위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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