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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태조 시대 관련 인물 2

by 무님 2020.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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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래 - 1362(공민왕 11)∼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초명은 이내(). 자는 낙보()·안국(). 아버지는 우정언() 이존오()이며, 우현보()의 문인이다.

1371년(공민왕 20) 아버지 이존오가 신돈()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병으로 죽고, 이어 신돈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에 특임되었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에 우사의대부()에 올랐다.

1392년(공양왕 4)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서 공주에 은거하였다. 1399년(정종 1) 좌간의대부로 등용되고, 이듬해인 1400년에 이방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추충좌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곧 좌군동지총제가 되었고, 계림군()으로 봉작되었다. 1402년(태종 2) 첨서승추부사()가 되었다가 그 해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404년 정조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곧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1407년 경연관을 거쳐 세자의 스승인 좌빈객()을 지냈으며, 1408년에 지의정부사 겸 판경승부사에 이르렀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경절()이다.

 

 

 

2. 이무 - 1355(공민왕 4)∼1409(태종 9).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 자는 돈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우왕 때 밀직사사가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이인임()의 당으로 몰려 곡주()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다시 등용되어 1393년(태조 2)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조정의 특명으로 경상도의 군사를 점검하였다. 그 뒤 중추원사(使)가 되어 강서(西: )·강화 등지의 병선을 점검해 요소에 배치하는 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396년 조정에서는 우정승 김사형()을 5도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과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1398년 참찬문하부사·판예조사·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使)가 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세자 이방석()을 보필하던 정도전()·남은() 등이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 )에 모여 반란을 모의한다는 정보를 이방원(: 태조의 다섯째 왕자)에게 밀고해 그들을 급습, 평정한 공로로 정사공신() 2등에 책훈되었다.

1400년(정종 2)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의흥부윤(使)이 되었다. 그 해 7월남은·정도전과 친교가 두터운 불충지당으로 지목되어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곧 근기()에 안치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그 해 판삼군부사()가 되어, 이방원을 도와 이방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 1등에 책훈되었다. 1402년(태종 2)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 해 영승추부사()가 되었다. 1409년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의 옥사에 관련되어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에 옮겨져 그곳에서 사형되었으며, 뒤에 신원되었다. 문관으로 입신했으나, 문무를 겸비해 왜구 격퇴와 대마도 정벌 등을 비롯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06년김사형·이회() 등과 더불어 원나라 이택민()이 만든 「광피도()」와 승려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정리, 합편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조선과 일본을 넣어 『역대제왕혼일강리도()』를 만들었다. 시호는 익평()이다.

 

 

 

3. 이직 - 조선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성주(). 자는 우정(), 호는 형재(). 증조는 정당문학() 이조년()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 이포()이며, 아버지는 문하평리() 이인민()이다.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경순부주부(簿)에 제수되고, 그 뒤 사헌지평·성균사예·전교부령()·종부영(簿)·밀직사우부대언()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중추원도승지()·중추원학사()로서 사은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태조 6) 대사헌을 지내고, 1399년(정종 1) 중추원사(使)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使)를 겸임해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使)·지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뒤의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4등이 되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판사평부사()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의 관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이 되고,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를 겸임하고, 1410년 천릉도감제조(調)로서 덕릉()·안릉() 등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으로 진봉되었고, 1414년 우의정에 제수되어 진하사(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세종 4)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이직의 조인가객

 

 

4. 자초 - 고려 말ㆍ조선 초의 승려이다. 성은 박(), 호는 무학(). 계월헌(). 18세에 승려가 되어 소지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로부터 불법을 배운 뒤 진주()의 길상사(),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했다.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에 유학, 지공선사()와 당시 원나라에 가 있는 혜근()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후 1356년 귀국했다. 1373년 왕사()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1376년 혜근이 회암사()에 살며 낙성회()를 열 때 수좌()로 초청받았으나 이를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대조계종사ㆍ선교 도총섭ㆍ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ㆍ묘엄존자()의 호를 받고 다시 회암사에 있다가 그 다음 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지상()을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데 찬성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그의 수탑()이 회암사() 북쪽에 세워지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에 가 있다가 사망했다.

 

 

 

5. 조사의 - ?∼1402(태종 2). 조선 전기의 반신()이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1393년(태조 2)에 형조의랑이 되고, 그 뒤 순군()을 거쳐 1398년 첨절제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1402년(태종 2)에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구실로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박순()·송류()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들을 죽이고, 평안도의 덕천·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으로 내려오던 도중 이천우()의 유기() 100여 명을 사로잡고 파죽지세로 내려오다가 고맹주()에서 이천우의 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사기를 잃은 부하들이 이산하자 그는 안변으로 후퇴하다가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게 체포,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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