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순지 - 조선전기 승정원좌부승지,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천문학자이다.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교리·봉상시판관·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승정원좌부승지 등을 거쳐 1465년(세조 11)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이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算學)·천문·음양·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정평(靜平)이다.
2. 이천 - 1376(우왕 2)∼1451(문종 1). 조선 세종 때의 무신·과학자이다.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불곡(佛谷). 군부판서 이송(李竦)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에 17세의 나이로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1402년(태종 2)에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兵船)을 만드는 일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도 틈틈이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더 아름다운 자체(字體)와 인쇄 능률을 높이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甲寅字)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鄭招)·장영실(蔣英實)·김빈(金鑌)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大簡儀)·소간의·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규표(圭表)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병선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갑조법(甲造法), 즉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3. 이종무 -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재직 중 왜구가 침입해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의주의 병마절제사를 거쳐,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에 제수되었고 이어 우군총제를 겸했으며, 이 해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안주도병마사, 1411년 안주절제사를 거쳐, 이듬해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 해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는 등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의 허점을 틈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벌군을 지휘해 대마도를 공략, 대소 선박 129척과 가호(家戶) 1,940여 호를 소각했으며, 적 114급(級)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노이(盧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복관되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해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행한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계하지 않아 1423년 과천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복관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4. 정초 - 조선의 정치가. 자는 열지(悅之),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하동(河東). 집의(執義) 희(熙)의 아들. 14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407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집의ㆍ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ㆍ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우사간(右司諫)이 되고 1419년(세종 1) 공조와 예조의 참의(參議)ㆍ우대언(右代言), 이듬해 좌대언(左代言), 1422년 예조 참판을 지낸 뒤 다음해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나갔다. 그 뒤 형조 참판(刑曹參判)ㆍ이조 참판ㆍ좌군총제(左軍摠制)를 역임, 1430년 공조 판서로서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撰)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暦法)을 개정했다. 다음해 다시 왕명으로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찬진(撰進), 이어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필요한 이론적 자료를 여러 고전에서 수집했다. 1433년 이천(李蕆)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했으며 《삼강행실도발(三綱幸實圖跋)》을 편찬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역산(暦算)ㆍ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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