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래 - 1362(공민왕 11)∼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내(李徠). 자는 낙보(樂甫)·안국(安國). 아버지는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이며, 우현보(禹玄寶)의 문인이다.
1371년(공민왕 20) 아버지 이존오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병으로 죽고, 이어 신돈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올랐다.
1392년(공양왕 4)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서 공주에 은거하였다. 1399년(정종 1) 좌간의대부로 등용되고, 이듬해인 1400년에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곧 좌군동지총제가 되었고, 계림군(鷄林君)으로 봉작되었다. 1402년(태종 2)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가 되었다가 그 해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40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곧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1407년 경연관을 거쳐 세자의 스승인 좌빈객(左賓客)을 지냈으며, 1408년에 지의정부사 겸 판경승부사에 이르렀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2. 이무 - 1355(공민왕 4)∼1409(태종 9).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돈부(敦夫).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우왕 때 밀직사사가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이인임(李仁任)의 당으로 몰려 곡주(谷州)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다시 등용되어 1393년(태조 2)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조정의 특명으로 경상도의 군사를 점검하였다. 그 뒤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강서(江西: 禮成江)·강화 등지의 병선을 점검해 요소에 배치하는 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396년 조정에서는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1398년 참찬문하부사·판예조사·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가 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보필하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松峴: 松峴洞)에 모여 반란을 모의한다는 정보를 이방원(李芳遠: 태조의 다섯째 왕자)에게 밀고해 그들을 급습, 평정한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훈되었다.
1400년(정종 2)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의흥부윤(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義興府尹)이 되었다. 그 해 7월남은·정도전과 친교가 두터운 불충지당으로 지목되어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곧 근기(近畿)에 안치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그 해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어, 이방원을 도와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훈되었다. 1402년(태종 2)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 해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가 되었다. 1409년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관련되어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 옮겨져 그곳에서 사형되었으며, 뒤에 신원되었다. 문관으로 입신했으나, 문무를 겸비해 왜구 격퇴와 대마도 정벌 등을 비롯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06년김사형·이회(李薈) 등과 더불어 원나라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광피도(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정리, 합편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조선과 일본을 넣어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만들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3. 이직 - 조선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 증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이며, 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이인민(李仁敏)이다.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제수되고, 그 뒤 사헌지평·성균사예·전교부령(典校副令)·종부영(宗簿令)·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중추원도승지(中樞院都承旨)·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태조 6) 대사헌을 지내고, 1399년(정종 1) 중추원사(中樞院使)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임해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의 관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이 되고,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고, 14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서 덕릉(德陵)·안릉(安陵) 등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고, 1414년 우의정에 제수되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세종 4)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安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4. 자초 - 고려 말ㆍ조선 초의 승려이다. 성은 박(朴), 호는 무학(無學). 계월헌(溪月軒). 18세에 승려가 되어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로부터 불법을 배운 뒤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 묘향산의 금강굴(金剛窟)에서 수도(修道)했다.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에 유학, 지공선사(指空禪師)와 당시 원나라에 가 있는 혜근(惠勤)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후 1356년 귀국했다. 1373년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法)을 이어받았으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 살며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받았으나 이를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開國) 후 왕사(王師)가 되고 대조계종사ㆍ선교 도총섭ㆍ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ㆍ묘엄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다시 회암사에 있다가 그 다음 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鷄龍山) 및 한양(漢陽)을 돌아다니며 지상(地相)을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데 찬성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그의 수탑(壽塔)이 회암사(檜巖寺) 북쪽에 세워지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檜巖寺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菴)에 가 있다가 사망했다.
5. 조사의 - ?∼1402(태종 2). 조선 전기의 반신(叛臣)이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친척으로 1393년(태조 2)에 형조의랑이 되고, 그 뒤 순군(巡軍)을 거쳐 1398년 첨절제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1402년(태종 2)에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구실로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박순(朴淳)·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들을 죽이고, 평안도의 덕천·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으로 내려오던 도중 이천우(李天佑)의 유기(遊騎) 100여 명을 사로잡고 파죽지세로 내려오다가 고맹주(古孟州)에서 이천우의 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사기를 잃은 부하들이 이산하자 그는 안변으로 후퇴하다가 아들 조홍(趙洪)과 함께 관군에게 체포,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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