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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태조, 정종 시대 관련 인물4

by 무님 202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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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초상화

 

 

 

1. 이제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경순공주와 결혼, 태조의 사위가 되었다. 1392년 전법판서로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의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 1등으로 홍안군에 봉해졌으며 의흥친군위절제사가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살해되었다. 시호 경무(). 태조의 사위. 1352년(공민왕 1) 좌대언()이 되고 그 해 밀직제학()으로 연저수종공신() l등에 책록, 이성계()의 셋째딸 경순공주()와 결혼하였다. 1392년 전법판서()로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의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 1등으로 홍안군()에 봉해졌으며 의흥친군위절제사(使)가 되었다.

이듬해 우군절제사(使)가 되었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 )에게 살해되고 경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다. 세종 때 신원(),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2. 이종학 - 고려 말의 학자이다. 자는 중문(), 호는 인재(). 목은() 색()의 아들. 1374년(공민왕 23) 14세 때 성균시()에 합격, 1376년(우왕 2) 동진사()에 급제, 장흥 고사(使)가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사지신사()에 이르러 성균시를 관장하였다. 첨서밀직사사()를 거쳐 동지공거()로 있을 때 아버지 색이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종학은 해마다 성균시를 맡아 보아 물의가 많았다. 1389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아버지 색과 같이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1390년(공민왕 2) 이ㆍ초()의 옥이 일어나 부자가 함께 청주옥()에 하옥되었다가 때마침 수재를 당하여 같이 용서를 받았으나 1392년(공양왕 4) 또 함창()에 귀양갔다. 그 해 고려가 망하자 정도전() 등의 손흥종()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의 문하생인 김여지()가 마침 판관()으로 있어 법 외의 형을 집행치 못하게 하여 장사현()으로 이배되는 도중 뒤 쫓아온 홍종에게 무촌역()에서 피살되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화()를 입게 되었으며, 임종 때 아들에게 학문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아들 4명과 문집이 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

 

 

3. 이화 - 조선전기 영의정부사를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 호는 이요정(). 이성계의 이복동생이다. 이자춘()과 비첩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여 회군공신에 봉해지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 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의안군()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서훈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 다시 공을 세워 좌명공신() 2등에 서훈되었다.

그는 전후 4차에 걸쳐 공신에 피봉되고, 도합 570결()의 공신전을 받아 조선 초기 공신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에 영의정부사로 임명되자, 민무구()·민무질() 형제에 대하여 죄줄 것을 청하는 상소로 민씨 형제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기공친(: 기복·대공복·소공복에 해당하는 친척)·대공친(: 종형제 자매·중손·중손녀 및 질부와 남편의 조부모 또는 백숙부모 및 질부들의 겨레붙이) 이상의 종친은 관직 활동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친으로서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영의정부사라는 최고 관직에 임명된 것은, 태종 때 태조의 직계가 아닌 왕족은 왕위계승의 권외로 밀려나는 대신, 그들을 일반문무관처럼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시호는 양소()이다.

 

 

4. 정총 - 1358(공민왕 7)∼1397(태조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만석(), 호는 복재(). 아버지는 정당문학() 정추(: 일명 )이며, 조선개국공신 정탁()의 형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9세로 춘추관검열이 되고, 대간·응교·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1389년(공양왕 1)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

조선개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첨서중추원사()로서 서원군(西)에 봉하여졌다. 1394년(태조 3) 정당문학이 되고, 다시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과 같이 『고려사』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 및 인신()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때마침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트집잡혀 대리위()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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