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포 - 1392년 조선이 개국되면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이듬해 사헌중승(司憲中丞)을 거쳐 황주목사(黃州牧使)로 나갔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중추부지사(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상작(賞爵)이 낮다고 불평하여, 방원의 미움을 사서 죽주(竹州:永同)에 유배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던 중, 태조의 4남 방간(芳幹)과 5남 방원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반목을 기화로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을 일으켰다. 방간이 패하자, 이산(尼山)에 유배된 뒤 참수되었다.
2. 배극렴 - 고려 말 진주·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윤(鷄林尹)·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해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 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 완성했는데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한편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겨울 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에는 진주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울주전투와 청도전투·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 1380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1389년(창왕 1) 7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 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 해에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3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해 7월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어 1등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1392년 11월 세상을 떠났으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다.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이 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3. 심덕부 -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水原府)의 수령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다. 이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북청(北靑) 등지에서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경기좌우도·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해 일시적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왕석(王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하였다. 심덕부는 고려 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 토벌에 업적을 남겼다.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시킬 것,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할 것 등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 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한편, 심덕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은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이로써 이루어졌다. 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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