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근 - 본관 안동. 자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13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 ·흥해(興海) ·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 ·대사성 ·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陽村集)》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2. 길재 - 본관 해평(海平).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3. 김사형 - 본관 안동. 자 평보(平甫). 호 낙포(洛圃). 시호 익원(翼元).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7년(우왕 3) 집의(執義)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 1390년(공양왕 2) 밀직지사(密直知使)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 특진하였고,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으며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1399년(정종 1) 등극사(登極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가 되고, 1401년(태종 1) 좌정승(左政丞),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다.
4. 박위 - 본관은 밀양(密陽). 우달치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냈다.
1389년(창왕 1)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1389년(공양왕 1)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豐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 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때 밀성(密城)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 이성계의 호의로 석방되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5. 박포 - 조선의 건국에 대장군으로서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무(李茂)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된 것을 비방했다가 도리어 죽주(竹州)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에 소환되었다. 그 뒤 제2차 왕자의 난에 간여하였다.
마침 회안군(懷安君)방간(芳幹)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던 중 우박이 내리며 하늘에 붉은 빛이 나타나는 걸 목격했다. 그는 겨울에 비가 오고 하늘에 요사한 기운이 있음을 들어 근신할 것을 방간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맡지 말며 출입을 삼가고 의관을 정제해 행동을 신중히 하기를 고려조 자손인 여러 왕씨의 예와 같이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방간은 그러한 방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또 다른 방책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그는 “주(周)나라 태왕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아들인 왕계(王季)에게 왕위를 전할 뜻이 있으므로, 왕계의 두 형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형만(荊蠻)으로 도망하던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방간이 또 다른 방책을 요구하자 “정안군(靖安君)은 군사가 강해 많은 무리가 붙어 있고, 방간의 군사는 약하며 위태함이 마치 아침이슬과 같으므로 먼저 선수를 써서 쳐부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방간이 이 말을 좇아 군사를 일으켰는데, 공신 중 박포와 장사길(張思吉)만이 따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방원(芳遠: 뒤의 태종)을 좇았다. 방간은 패하자 토산(兎山)으로 귀양을 가고, 박포는 방간을 꾀어 난을 일으킨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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