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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태조. 정종 시대 관련 인물 1

by 무님 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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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근 - 본관 안동. 자 가원() ·사숙(). 호 양촌(). 시호 문충(). 초명 진().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 때 예문관응교()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예의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 때 좌대언() ·지신사()를 거쳐 밀직사첨서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우왕 1) 박상충() ·정도전() ·정몽주()와 같이 친명정책()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1389년(창왕 1) 윤승순()의 부사(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의 자문()이 화근이 되어 우봉()에 유배되었다가 영해() ·흥해() ·김해() 등지로 이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 ·대사성 ·중추원사(使)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 ·문하부참찬사()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1등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세자좌빈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에도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은 후일 이황() ·장현광()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 《사서오경구결()》 《동현사략()》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이 있다.

 

 

야은 길재 선생

 

2. 길재 - 본관 해평(). 자 재보(). 호 야은() ·금오산인(). 시호 충절(). 금주지사 () 원진()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 도리사()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 사록()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를 거쳐 성균박사()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를 비롯하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이 있다.

 

 

3. 김사형 - 본관 안동. 자 평보(). 호 낙포(). 시호 익원(). 음보()로 앵계관직()이 된 후 감찰규정()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7년(우왕 3) 집의()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使), 1390년(공양왕 2) 밀직지사(使)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문하부지사()로 특진하였고, 뒤에 삼사우사(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로 판상서사사()와 병조전서()를 겸임하였으며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어 문하우시중()에 상락백()으로 봉해졌다. 1399년(정종 1) 등극사(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하부판사()가 되고, 1401년(태종 1) 좌정승(), 이듬해 영사평부사()로 부원군()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다.

 

 

4. 박위 - 본관은 밀양(密陽). 우달치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냈다.

1389년(창왕 1)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1389년(공양왕 1)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豐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 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때 밀성(密城)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 이성계의 호의로 석방되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5. 박포 - 조선의 건국에 대장군으로서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무()가 정사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을 비방했다가 도리어 죽주()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에 소환되었다. 그 뒤 제2차 왕자의 난에 간여하였다.

마침 회안군()방간()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던 중 우박이 내리며 하늘에 붉은 빛이 나타나는 걸 목격했다. 그는 겨울에 비가 오고 하늘에 요사한 기운이 있음을 들어 근신할 것을 방간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맡지 말며 출입을 삼가고 의관을 정제해 행동을 신중히 하기를 고려조 자손인 여러 왕씨의 예와 같이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방간은 그러한 방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또 다른 방책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그는 “주()나라 태왕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아들인 왕계()에게 왕위를 전할 뜻이 있으므로, 왕계의 두 형인 태백()과 중옹()이 형만()으로 도망하던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방간이 또 다른 방책을 요구하자 “정안군()은 군사가 강해 많은 무리가 붙어 있고, 방간의 군사는 약하며 위태함이 마치 아침이슬과 같으므로 먼저 선수를 써서 쳐부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방간이 이 말을 좇아 군사를 일으켰는데, 공신 중 박포와 장사길()만이 따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방원(: 뒤의 태종)을 좇았다. 방간은 패하자 토산()으로 귀양을 가고, 박포는 방간을 꾀어 난을 일으킨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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