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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태조 시대 관련 인물 1

by 무님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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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한로 - 1358년(공민왕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광산군()김자빈()이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장인이다. 1383년(우왕 9) 문과에서 장원급제해 예의좌랑()을 지냈다. 조선 개국 후 태종과 동방()이라는 인연으로 태종의 우대를 받았다. 1401년(태종 1) 판봉상시사()로서 의순고별좌()가 되었을 때, 태상왕(: 태조)이 명나라 사신을 위해 베푼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역리()의 말을 빼앗아 쓴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404년(태종 4) 이조전서()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체재 중 상업 행위를 한 사건이 탄로나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07년(태종 7) 세자 양녕대군을 사위로 맞이하면서 좌군동지총제()에 오르고, 이듬해 판한성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태종 9) 예조판서가 되고 광산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대사헌·참찬의정부사()·예문관대제학 겸 판의용순금사사()·의정부찬성() 등을 지냈다. 1418년(태종 18) 세자궁에 여자를 출입시킨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 하옥된 후 직첩을 몰수당하면서 죽산으로 부처됨과 동시에 세자와의 인연이 끊겼다.

곧 이어 아들 김경재()와 함께 나주로 이배되었고, 이후 대간의 집요한 추가 처벌 요청이 있었으나 청주·연기 등지로 안치됨에 그쳤다. 1425년(세종 7) 5월 『태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 수집 때 화재로 인한 소실로 사초를 제출하지 못해 백은() 20냥과 자손금고()의 처분을 받았다. 양녕대군이 특별히 세종에게 용서를 청했지만 징은()만 면제받았다. 1431년 세종에 의해 아들 김경재의 서용이 거론되었으나 안숭선()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에 추증되고, 광산군의 군호도 회복되었다.

 

 

신추우야(新秋雨夜) / 변계량 (卞季良)

 

 

2. 변계량 - 조선전기 수문전제학, 의정부참찬,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 호는 춘정(). 변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변원()이고,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 변옥란()이다. 어머니는 제위보부사(使) 조석()의 딸이다. 이색()·권근()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簿)·비순위정용랑장() 겸 진덕박사()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 겸 전의감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의학교수관()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에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 초에는 성균관학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었다. 이 때 가뭄이 심해 상왕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에 빌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이 변계량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 그 뒤 태종 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419년에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를 앞세운 기해동정()을 성공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화산별곡()」·「태행태상왕시책문()」을 지어 조선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 『춘정집()』 3권 5책이 전한다. 『태조실록()』·『국조보감()』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에 참여했고, 기자묘()의 비문과 「낙천정기()」·「헌릉지문()」을 찬하였다.

그 외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만한 것을 모아 쓴 『정부상규설()』이 있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숙()이다.

 

 

3. 이거이 - 조선전기 영사평부사, 우정승,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낙천(), 호는 청허자(). 평장사() 이공승()의 6대손이다. 조선 왕조가 건국된 뒤 1393년(태조 2)에 우산기상시()에 임명되고, 그 뒤 평안도병마도절제사·참지문하부사()·참찬문하부사·판한성부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거이의 출세는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이었다. 왕자의 난 직후에 책봉된 정사공신()에 올랐으며, 또한 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좌명공신()에 책봉되었다. 사실 이거이는 조선 왕조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이거이의 아들 이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와 혼인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이백강()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가 조선 왕조 건국 이후에도 이거이의 정치적 진출을 쉽게 하였으며, 나아가 태종의 집권 이후에도 이거이가 공신이 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종이 재위할 때 시행된 사병혁파() 조처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연유가 되어 한때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이 후 1402년(태종 2) 좌명공신이 되고 또한 영사평부사()로 승진되었다. 이 후에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어서는 우정승을 거쳐, 영의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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