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현보 - 1333(충숙왕 복위 2)∼1400(정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우길생(禹吉生)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실패해 파직되었다. 그 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이초(彛初: 尹彛와 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외방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유배되고,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392년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이로 인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에 다시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었다. 1398년(태조 7)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고, 1399년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손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로, 왕의 재위시에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2. 원천석 - 고려후기 정치의 문란함에 개탄하여 출사하지 않은 은사(隱士)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해 1360년(공민왕 9)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천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원천석이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이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이 시에서 원천석은 만일 왕씨 혈통의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3. 이숭인 - 고려후기 『도은집』을 저술한 학자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 본관은 성주.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아버지는 이원구(李元具)이며, 어머니는 언양 김씨(彦陽金氏)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이어서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長興庫使 兼 進德博士)가 되었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다. 이후 예의산랑(禮儀散郎)·예문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냈고, 우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갔다.
귀양에서 돌아와 성균사성이 되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전임하여 동료와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이어서 밀직제학이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실록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전임하였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어서는 원나라 서울에 가서 신정(新正)을 축하하고 돌아와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창왕 때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변론하다 무고로 연좌되었고, 헌사(憲司)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자 피해 다니다가 시중 이성계(李成桂)의 도움으로 다시 서연(書筵)에 시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관 구성우(具成佑)·오사충(吳思忠)·남재(南在)·심인봉(沈仁鳳)·이당(李堂) 등이 상소를 올려 탄핵하여 경산부로 유배되었다. 당시 첨서밀직사사 권근(權近)이 이숭인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죄를 상소했으나, 간관이 도리어 권근의 상소가 거짓을 꾸민 것이라 상소하여 우봉현(牛峯縣)으로 이배되었다. 공양왕 때 간관이 이숭인을 다시 논죄하여 다른 군으로 이배되었고, 후에 청주옥(淸州獄)에 수감되었으나 수재로 인하여 사면되었다.
얼마 뒤 소환되어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삭직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 조선의 개국에 이르러 자기와 함께 처세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은 정도전이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보내어 유배지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이숭인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문사(文辭)가 전아(典雅)하여, 이색(李穡)은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고, 명나라 태조(太祖)도 일찍이 이숭인이 찬한 표문(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라고 평가했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저서로는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그 서문에 의하면 생존시에 『관광집(觀光集)』·『봉사록(奉使錄)』·『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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