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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태화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절 < 마곡사 >

by 무님 2020.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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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는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本寺)이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 나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 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산길이 나온다. 산길 옆으로는 계곡이 흐르는데 계곡물의  맑음과 시원한 크기가 내려가 발이라도 담궈 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다. 마곡사를 보기 위해서는 제법 많은 산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그래도 그 길을 걷기에 길지 않게 느껴지는 건 산과 계곡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삶에 지친 마음도 힐링이 될 만큼 편안히 걸을 수 있다. 

 

마곡사는 공주의 태화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절집을 돌아보다 보면 마곡사가 태화산을 마당 삼아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넓은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마곡사의 절집은 다 돌아보기는 힘들다. 그 규모만큼 이 절의 역사는 길고 그래서 전해 오는 설화가 많다.

마곡사가 위치한 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 지눌()이 제자 수우()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마곡사의 큰 절집인< 대웅보전 >은 싸리나무 기둥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통층으로 전각의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네 개가 있는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사람이 죽어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이란다.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생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고 일렀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재미난 전설로 인해 지금도 이 싸리나무 기둥은 윤기가 나고 손때가 묻어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여인들의 간절함이다 '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이라는 뜻이다.마곡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마곡사의 <대광보전>에는 앉은뱅이 업자의 설이 전해 내려온다.

 ' 앉은뱅이,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세세생생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날은 그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삿자리를 짜기 시작하면서 앉은뱅이로서의 삶을 거두고 걸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 자비광명을 얻게 만 된다면 이생을 넘어 세세생생 보시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부처님께 의지하며 생활한지도 어느덧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도 주제 넘는 소원을 품었던 터라 더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가진 업보가 그 얼마나 큰데 감히 부처님께 그런 소원을 빌다니! 얼마나 더 공덕을 쌓아야 그 동안 지은 억겁의 죄업을 다 씻을 수 있을 것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지난 100일 동안의 기도 끝에 깨달은 것은 첫째도 참회요, 둘째도 참회였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 될수록 그는 걷게 되는 것을 염원하기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핀 들꽃이 소중하고 그것이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무엇에건 감사하게 되었다. 들꽃과 함께 호흡하고 나를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부처님께 감사했다. 일체의 삼라만상에 부처님의 자비를 회향하겠노 라고 다짐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100일이 채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삿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부처님께 기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는 그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무심히 흐르는 마곡천을 바라보며 부처 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또 다짐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숲,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향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누는 삶, 자비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대광보전에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 전설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당 안에 삿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1788년에 중창되었으며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광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건물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대광보전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788년 조성된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비로자나 부처님 뒷벽에는 18세기 후반 조선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음보살님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마곡사의 <영산전>은 영험의 기운 응집되어 있는고 한다.

“예가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태화산 군왕대의 혈 자리라.”마곡사의 영산전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인재 배출을 원하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하고 있습니다.영산전은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에 중수돼 현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산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불 7구가 남아있습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인 방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 가운데에 과거칠 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과거칠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일컫습니다.

 

마곡사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에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었던 <백범당>이 있다는 것이다.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 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마곡사는 태화산을 아름답게 만든다. 넓은 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절집은 그곳을 보러 걷는 것이 등산을 하는 기분이 들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 연결되 있음이 느껴지도로 가는 길 곳곳은 잘 정돈 되어 있기도 하고 아름다은 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렇게 넓은 땅위에 있으면서도 마곡사의 절집은 아늑함이 느껴진다. 절집이 가지고 있는 오랜 시간의 빛바랜 흔적이 정겹고 편안하게 와 닿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절집의 주변을 감싸는 계곡이 절집을 한결 운치있게 만들어 준다. 마곡사는 필자가 좋아하는 절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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