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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화담 서경덕 과 황진희

by 무님 202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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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은 개성 출신이다. 본관은 당성(). 자는 가구(), 호는 복재()·화담(). 아버지는 부위() 서호번()이며, 어머니는 한씨()이다.

이()보다 기()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을 완성하여 주기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화담() 서경덕(, 1489~1546)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일화로, 그가 어릴 때부터 생명 현상의 이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남달랐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다. 서경덕이 12살 때(1501) 서당에서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366일을 1년으로 삼고 윤달로 사시()를 정하고 해를 이루게 했다’(, )라는 대목을 읽는데, 훈장님이 이를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서경덕은 보름 동안 그 이치를 궁리한 끝에 스스로 깨달았다. 이는 우주의 이치에 관한 호기심과 탐구욕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14세에야 개성의 어느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16세에는 『대학』을 읽은 뒤 그 뜻을 깨닫고는 기쁨에 겨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7살 때에는(1506)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대목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배우는 데에 먼저 물()의 이치를 탐구하지 아니하면 책만 읽어서 무슨 소용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물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그 이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20살 때에는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자주 잊은 채 사색에만 잠기는 습관이 생겨 3년을 그렇게 지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의 주도로 시행하게 된 현량과에 천거되었지만 사양한 것, 1531년(중종 26년)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생원과에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끝내 응시하지 않은 것, 그리고 1544년 말년에 후릉참봉(. 후릉은 개성에 있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 벼슬을 받았지만 곧 사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른바 처사()의 길,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하는 선비의 길로 일관했다. 내성외왕(-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의 길 중에서 내성의 길에만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덕이 벼슬길에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 참여하는 출()의 길이 아니라 뜻과 마음을 온전히 지키면서 은일()에 머무는 처()의 길을 걸었던 것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이 9살 때인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선비들의 대수난이 시작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잠시 조광조와 사림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1519년 기묘사화()로 다시 피바람이 부는 등, 문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가 그칠 줄 몰랐다. 안 그래도 처사형 기질이 짙다고 할 수 있는 서경덕에게 그러한 현실은 더욱더 처사로서의 소신과 삶의 자세를 굳히게 만들었을 것이다.

15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에 어찌 복()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의 상복을 입었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황진이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진이(진랑)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다. 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꽤 얼굴이 아름다웠다. 18세 때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에 와서 기둥에 기대서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물을 청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으며 돌려주면서 “너도 시험 삼아 마셔보아라” 하였다. 마시고 보니 그것은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고 불렀다. 개성유수 송공(송염 또는 송순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 마침 절일()을 당하였다. 낭료()들이 부아()에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랑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가냘프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한 번 진이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西)의 명물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 하고는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잡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붉게 분칠한 여인이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떨기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왔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으로서 광채가 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된 잔치에서 손님들 중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그의 첩이 발 안에서 엿보고 전과 같은 변을 벌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로 하여금 파라(,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진랑은 얼굴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를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이때 송공이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하였다.

악공 엄수는 나이가 일흔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 안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하였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하였다. 노랫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 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 하였다.

이때 조사(使, 중국에서 오던 사신)가 본부()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 선비와 부인)들과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길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우두머리 사신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 관()에 이르러 통사(,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천하절색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진랑이 비록 창류()이긴 했지만 성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의 주석()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의 천예()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 보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화담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니, 화담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이 어찌 절대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의 어사로 갔을 적에는 병화()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 안에 사는 서리 진복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하였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을 가져서 그랬던가?”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다. '

                                                                - 이덕형이 지은 「송도기이()」 -

 

 

' 황진이는 한때 이름을 떨쳤다. 종실인 벽계수가 스스로 지조와 행실이 있다 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이 한 번 황진이를 보면 모두 현혹된다. 내가 만일 당하게 된다면 현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쫓아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이가 이 말을 뜨고 사람을 시켜 벽계수를 유인해왔다. 때는 늦가을이었다. 달밤에 만월대에 오르니 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진이가 문득 소복단장으로 나와 맞이하며 나귀의 고삐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명월은 자신의 자를 인용한 것이며, 수()는 수()로 대신했으니, 즉경()을 그대로 노래로 옮긴 것이다. 벽계수는 달 아래 한 송이 요염한 꽃을 대하고 또 그 목소리가 마치 꾀꼬리가 봄 수풀에서 지저귀고 봉황이 구소()에서 우는 것 같음을 들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해서 나귀 등에서 내렸다. 진이가 말하기를 “왜 나를 쫓아내지 않으세요?” 하니, 벽계수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히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백호() 임제의 「청초 우거진 골에」의 치제설()이 있으나 그는 훨씬 후세의 사람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는 갔어도 그녀가 남긴 시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고, 지금도 그녀를 일컬어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시를 잘 쓴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황진이를 개성의 3절(, 박연폭포ㆍ서경덕ㆍ황진이)의 하나로 부르는 것이다. 황진이의 시 몇 수를 소개한다.

어저 내일이면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내 언제 신이 없이 임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 이능화가 지은 『조선해어화사』 -

 

서경덕과 황진이가 같은 중종 시대에 개성에서 살았다는 것(황진이의 생몰 연대는 불확실), 황진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 작품이 있기에 그가 문학적 능력과 교양을 갖춘 범상치 않은 기생이었으리라는 것, 또한 서경덕이 도가적 성향까지 보이며 권력과 명예, 재물과는 거리가 먼 비주류 방외지사()의 삶을 살았다는 것. 이러한 몇몇 요소들이 서경덕과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낳고 또 점점 더 굳어지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그들이 실제로 모종의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고고한 선비와 기생의 관계라는 점에서 당대에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못하고있다가 개성 일대에서 일화의 형태로 전해 내려와 널리 퍼졌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1546년(명종 1년) 57세 때 서경덕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이미 2년 가까이 병들어 지내 온 터였다.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고 임종을 앞 둔 그에게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 서경덕이 답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달은 지 이미 오래이니, 내 지금 마음이 편안하구나.” 서경덕의 마지막 말이었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이라는 서경덕의 시에서 ‘애도’보다는 ‘평정심’을 더 느낄 수 있으니,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화담 서경덕의 묘

 

유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년~ 1546년)의 묘는 고려 2대 혜종의 순릉과 송도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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