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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시대 학자 남명 조식

by 무님 2020.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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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1501(연산군 7)~1572(선조 5)]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건중() 혹은 건중()이고, 호는 남명()·방장산인()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경상도 삼가현() 토골[]에 있는 외조부 이국()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주자()·정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펼쳐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1520년 사마시 초시와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그 다음해 합격에 실패하였다.

1526년 부친이 죽자 상을 마치고 의령의 산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1531년 생계가 곤란하자 살림이 넉넉한 김해의 처가를 찾아가 탄동()에서 '산해정'()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생활하였다.

1533년 향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하였고, 1536년 다시 향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1537년의 회시에 나아가지 않았다.

1539년 유일()로 천거되어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4년에는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 전성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관직에 나아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 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서 학문에만 전념하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 1556년 하항(), 1563년 김우옹(), 1565년 최영경(), 그 이듬해 정구()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1567년 5월 명종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 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 차례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치란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논하고 낙향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선조 때 대사간,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진주의 덕천서원(), 김해의 신산서원(), 삼가의 용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명집』·『남명학기유편』()·『파한잡기』()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남명가」·「권선지로가」() 등이 전한다.

조식은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곽재우()·정인홍·김우옹·최영경·김효원()·오건·이제신()·강익()·문익성()·박제인()·조종도()·곽일·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어서, 조식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는데, 그의 문인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을 일으켰다. 조식의 문인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남명 조식의 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조식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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