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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10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1. 정성근 - 조선전기 해주목사, 경기도경차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정자순(鄭子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설(鄭舌)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정척(鄭陟)이다. 어머니는 이양몽(李養蒙)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다. 이듬해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구황적간(救荒摘奸)하기 위해 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전한을 거쳐 대마도선위사(對馬島宣慰使)로 파견되었다. 14.. 2020. 10. 10.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1. 폐비 신씨 -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12월 15일(음력 11월 29일)~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 는 연산군(燕山君)의 왕비(王妃)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세자빈 간택을 통해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지면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으로 처소를 옮겼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 2020. 9. 21.
연산군시대 사간 이극돈 이극돈은 조선 전기의 문신. 좌리공신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성절사,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1459년(세조 5) 형조좌랑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통례문판관에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467년(세조 13) 호군(護軍)으로 부산포에서 유구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집의로 임명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호전(戶典) 중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불.. 2020. 4. 10.
연산군시대 학자 김일손 <조의제문>을 사초하다 김일손은 조선전기 『탁영집』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 소미산인(少微山人),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조부는 김극일(金克一), 부친은 자진(子進) 김맹(金孟)이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이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김맹(金孟) 역시 가학을 계승하고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 2020. 4. 7.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 소혜왕후(昭惠王后)는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비(妃). 성은 한씨 (韓氏). 본관은 청주(淸州). 서원부원군 확(確)의 딸이며, 좌리공신(佐理功臣) 치인 (致仁)의 누이동생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라는 시호 보다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유명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여성이며, 여성 지식인이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더욱 유명한 인수대비는 시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몸소 지켜보았고,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대신해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면서 대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훈(內訓)]이라는 여성 교육서를 만든 지.. 2020. 4. 6.
연산군 일기 는 조선왕조 제10대 왕 연산군의 재위기간 1494년 12월에서 1506년 9월인 11년 9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모두 63권 4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므로 묘호가 없고, 그 실록도 노산군(단종), 광해군의 예와 같이 일기라고 칭하였으나, 체제나 내용 면에서 다른 실록과 별로 다름이 없다. 의 편찬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나자 1506년인 중종1년 11월에 시작되었다. 폐위된 왕의 실록 편찬이므로 일기수찬이라는 이름으로 일기청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므로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으나 후임 대제학 신.. 2020. 4. 6.
연산군, 천명의 기생과 향락을 즐긴 폭군 그리고 그의 최후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어린시절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되었다. 하지만 어린 연산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알지도 못한채 가족들이 자신을 멀리 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끼며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런 연산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사연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을 방관하고 외면했던 이들에게 복수을 칼날을 갈기 시작한다. 그리고 왕권을 잡기 위한 무오사화를 일으키며 많은 피를 보게 된다. 또한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기위해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궁에는 피바람이 멈출날이 없었다. 연산의 만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연산군 11년인 1505년 6월, 연산군은 전국 팔도의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는 지방 관리인 '채홍주사'를 파견한다. "이제 이계동을 전라도에 , 임숭재를 경상도.충.. 2020. 3. 14.
연산군의 장녹수에 대한 사랑 가난해서 시집도 여러 번 가고 자식까지 둔 여인이 왕에게 발탁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바로 장녹수(張綠水, ?~1506) 이야기이다. ‘연산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장녹수는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출신에서 일약 후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30세의 나이에도 16살 꽃 다운 여인으로 보였다는 동안(童顔) 장녹수는 자식을 둔 후에도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의 길로 나섰고,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탕한 삶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다. 그녀는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발판 삼아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모든 상과 벌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2020. 3. 9.
폭군 연사군의 첫 번째 피바람 '무오사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을 닮고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고, 신하들의 목소리에 경청하였다. 그렇다 보니 성종과 대신, 대간들 간의 적절한 균형 속에 정치가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왕권이 약화될 소지가 있었다. 특히 바른 소리를 하는 대간의 행동이 왕권강화를 원하는 연산군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 무오사화 '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총 4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화란 조선의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 때에는 총 2차례가 일어나게 된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사초가 계기가 되어 일어나게 된다. 사로란 을 만들기 위한 역사기록이다. 사초 중에서도 사림의 대표 주자였던 김종직이 쓴 이 계기가 되.. 2020.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