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과 48현이 산다는 조선이 새로이 탄생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두문동에 문무관 72현과 42현이 산다는 소문이 퍼져, 백성들 사이에는 고려에 대한 향수가 더욱 짙어갔다.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는 사람들은 구관의 재산을 빼앗아다가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백성들을 위해 역성혁명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백성들을 위하기는커녕 자기들 잇속을 챙기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개서 백성들은 새 정부가 수도를 옮기기 위해 한양에 궁궐을 짓고 있던 터여서 삶의 터전마저 잃게 되어 절망하고 있었다. 개성에 남아 있자니 벌이가 막막했고, 조정을 따라 한양으로 가자니 낯선 땅이 두렵기만 했다.
새 조정에 협조했던 고려의 신하들은 자시들이 이제껏 이뤄놓은 개셩의 가산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옮기는 일이 심란하기만 했다. 이처럼 개국공신 가운데 개성에 기반을 튼튼히 다져놓은 신하들은 천도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민심이 따라주지 않아 새 조정은 천도를 더욱 서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개국공신들이 청루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배극렴.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특히 배극렴은 공민왕의 정비에게서 옥새를 빼앗다시피 하여 이성계에게 바쳐 개국 일등공신에 책록 된 공신으로서, 직위가 정승이었다.
청루에 배극렴의 눈에 드는 기생이 있었다. 몸매가 곱고 얼굴이 복스러웠다. 악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배극렴은 그 기생에게 정성을 들였다.
"이름이 뭐더냐?"
"정승께오서 천한 것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겠나이까?"
말 속에 뼈가 있었으나 배극렴은 기생에게 빠져 어여쁘게 보였다.
"천한 것이라니 당치 않구나. 너는 지금 개국공신들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느니라."
"그렇다고 천한 것이 개국공신이 되겠나이까?"
"이름을 말해보라."
"설매이나이다"
"눈 속의 매화라.... 좋은 이름이로다."
"이름은 그럴듯하오나 절개는 대감마님과 별로 다른 바 없나이다."
"무슨 말이더냐?"
"그냥 농으로 한 말이나이다."
"고것 참 맹랑하도다."
배극렴은 설매의 말이 너무도 귀엽게 느껴져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을 지경이었다. 점점 더 주흥이 도도해져 갔다. 배극렴은 설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된 행동거지가 배극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술에 취하고 설매에게도 취해갔다.
"설매야, 너 오늘밤 나와 만리장성을 쌓아보지 않으려느냐?"
"무너진 성은 쌓아서 무얼 하오리까?"
설매의 대답이 쌀쌀맞았다.
"내가 맘에 들지 않느냐?"
"천 것이 마음에 들고 아니 드는 사내가 어디 있겠나이까?"
"내 너를 호강시켜주겠다."
"으레 듣는 소리 오니 못 들은 걸로 하겠나이다."
설매는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배극렴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하찮은 기생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어서 심기가 편치 않았다.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개국공신의 체면을 살리고 싶었다.
"네 요년! 너는 동가식서가숙 하는 기생이 아니더냐! 오늘 밤 나의 수청을 들라!"
배극렴의 큰 소리에 좌중은 무슨 일인가 하여 조용해졌다.
설매는 입가에 냉소를 띠고 배극렴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겠나이까? 수청 들라면 들어야지요. 하지만 대감께서도 절개는 이 천한 것과 다를 바 없나이다."
"뭣이야? 네가 감히 나의 지조를 말하다니, 무엄하구나!"
"대감, 어제는 왕씨에게 오늘은 이씨에게 몸을 의탁하는 대감과 동가식서가숙하는 이년과 무엇이 다르리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겠나이까?"
"저 저 저런 요망한 것이 있나!"
배극렴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다른 개국공신들은 설매의 가시 돋친 말에 핏기를 잃어갔다. 거기 모인 고려 유신들은 괴로워 신음을 토해냈다. 배극렴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깊숙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설매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나 공신들은 설매를 외면한 채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일개 기생의 말 한마디가 명분 없이 고려를 무너뜨린 개국공신들에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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