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을 상징하는 두문동은 경기도 개퐁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예 지명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을 반대했던 고려 유신 신규. 신혼. 신우. 신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성사재 등 72현이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새 왕조에 있어서는 두문동이 눈엣가시였다. 아무리 회유책을 쓰고 높은 관직을 준다 해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성계는 생각다 못해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려는 뜻도 있었으나, 고려의 충절 높은 유신들을 끌어안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과거를 치르는 날 이성계는 초노한 마음으로 두문동의 인재들이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이성계의 짝사랑일 뿐이었다. 두문동의 선비는 커녕 전국의 뜻있는 선비들은 과거를 무시해버렸다. 기껏 입신양명에 눈이 어두운 조무래기 선비들이 모여 재주를 뽐냈다.
그런데 더 참담한 것은 국학에 머물러 있던 태학생들이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국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두문동으로 들어간 선비들이 태학생을 비롯하여 72명이나 되었다. 문과 시험을 맥없이 치르고 무과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문과와 다를 바 없었다. 이름난 무관들은 무과시험을 무시하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48명이었다. 문인들은 서두문동에 모여 살고, 무인들은 동두문동에 모여 살았다. 이들은 산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자급자족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의 특사로 여러 사람들이 두문동을 다녀왔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리들을 이대로 놓아두시오. 소리 내지 않고 살겠소."
"새로운 나라의 새 조정에 나와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해주시오. 전하께오서 그대들의 출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오."
"누구의 전하가 우릴 기다린단 말이오?"
"불경스럽소. 말씀 삼가시오!"
"불경이라니, 우리의 전하는 이 세상에 없소이다."
이성계는 특사의 보고를 받고 마지박 경고를 전했다.
"만약 나오지 않으면 산에 불을 지르겠다."
"맘대로 하시오. 불을 지르든 산을 무너뜨리든 알 바 아니오."
조정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성계를 비롯하여 정도전, 이방원, 남은, 조준 등 측근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저들이 이 조정을 우습게 알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성계가 물었다.
"전하, 새 조정으로서는 그들에게 할 만큼 했소이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사오니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나이다."
남은이 말했다.
"특단의 조치라면?"
"그들을 없애야 나라가 조용해지나이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예로부터 충의지사는 함부로 다루지 안이했나이다. 죽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조준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언제까지 그들을 봐준다는 말이오? 그들이 있는 한 나라에 온갖 유언비어가 퍼져 백성들을 회유하는 데 짐이 될 뿐이오. 이번에 그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하오." 이방원이 성을 발끈 냈다.
"옮은 말이오. 화근의 뿌리는 일찌감치 캐버리는 것이 상책이오. 전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신민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니, 역적이나 다를 바 없소. 역적을 그냥 두는 나라 법도 있소이까?" 정도전이 거들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하오. 그들을 죽였다가 아직 추스르지 못한 민심을 크게 읽으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오."
조준의 신중론에 이방원은 다시 화를 냈다.
"두문동 그자들에게 매달려 언제까지 전전긍긍하겠다는 게요!"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요.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지 않겠고?"
"그리는 못하오. 그들이 고려의 상징이 되어서는 아니 되오."
이성계는 이들의 다른 의견을 듣고 있다가 정도전에게 물었다.
"삼봉(정도전), 그들을 죽여야 할 까닭을 말해보오."
"전하, 그들은 전하에게 반기를 든 역도들이옵니다. 역도들을 살려둔 예가 한 번도 없나이다. 그러하옵고 그들을 중심으로 고려 복원 운동이 일어나 백성들이 동요하는 날에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할 사태에 직면하게 되옵니다. 화근의 뿌리를 캐어버리시옵소서."
"송당(조준), 양해하시오. 중론에 따라야겠소."
"전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소서."
"마지막 기회라면?"
"두문동에 불을 지르겠다고 미리 통보하소서. 그리하여 불길을 피해 살아 나오는 자들을 끌어안으소서."
"좋은 생각이오. 그리하십시다."
두문동에 불을 놓겠다는 통보가 전해졌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드디어 병사들이 두문동에 나타났다.
"너희들의 우거를 불사르겠다. 죽기 싫거든 나오너라!"
서두문동과 동두문동에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들이닥쳤다. 움막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병사들이 들고 온 기름을 움막에 끼얹었다. 이제 횃불을 붙이면 두문동의 움막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버릴 것이었다.
"살고 싶거든 나오너라!"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병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서두문동에서는 충신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그 속에 훗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황희가 끼어 있었다. 충신들은 황희의 그릇을 알고 있었다. 성균관 학관으로 있다가 나라가 바뀐 것이다.
"황학관, 그대는 이곳을 떠나 앞날을 기약하시오." 조의생이 권했다.
"당치 않은 말씀이오. 여러분과 생사를 같이할 따름이오."
"충절은 우리만으로 충분하오. 황 학관은 세상에 나가 백성들의 이웃이 되시오. 망국의 백성들이 의지할 사람이 절실한 때요. 황 학관이 그런 역할을 해 주시오."
성사제가 거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황희더러 망국민의 이웃이 되어 그들의 쓰라린 가슴을 달래주는 사람이 되라고 아우성이었다.
"날더러 변절하라 말이오?"
"변절이 아니라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희로애락을 함께하라는 말이오."
"그리는 못 하오"
"황 학관, 누군가 살아남아 우리의 충절을 세상에 알려야 할 게 아니오? 세상으로 나가 우리의 뜻을 밝히시오."
황희의 기세가 그제야 누그러졌다.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희는 이들의 뜻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각오로 두문동을 빠져나와 멀리 전라도 장수로 몸을 숨겼다.
병사들이 횃불을 움집에 붙였다. 기름 먹은 움집은 성난 듯 불꽃을 튀겼다. 움집에서 기어 나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조리 타 죽고 말았다. 시체 타는 냄새가 백 리 안에 퍼졌다. 노린내가 진동하여 인근 관가와 백성들이 코싸개를 하고 다녔다.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고스란히 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성계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들은 영원히 사는 삶의 길로 행하고, 나는 현실에서 발버둥 치는 승냥이가 되었구나."
두문동 72현과 48현은 이성계가 만들어 놓은 충신이었다. 그리고 두문동은 충절의 땅이 되어 역사 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야 할 때 죽는 것, 그 길은 참다운 삶의 길이 아니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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