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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정종실록

by 무님 2020.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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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은 조선왕조 제2대 왕 정종 원년인 1398년 정월부터 정종 2년 11월까지 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원래의 이름은 < 공정왕실록 >이고, 모두 6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세종 6년인 1424년 3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세종 8년인 1426년 8월에 완성하였다. 

<정조실록>은 본래의 이름은 <공정왕실록>이었다. 정종은 세상을 떠난 뒤 묘호를 올리지 아니하였고 명날 황제로부터 받은 시로 공정을 칭호로 하였기 때문에, 실록도 <공정왕실록>이라 하였다. 숙종 7년인 1681년에 그에게 정종이란 묘호를 추존하면서 실록도 <정종실록>이라 하고 표제만 바꾸었다. <정조실록>은 세종 8년 8월에 변계량, 윤회, 신장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으나 세종 20년인 1438년 9월 25일 <태조실록> 중의 제1차 왕자의 난이 소위 방석의 난과 <정종실록> 중의 제2차 왕자의 난인 박포의 난에 대하여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였다는 말이 있어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을 개편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 24년인 1442년 9월 4일에 춘추관 감관사 신개와 지관사 권제, 동지관사 안지 등이 태조, 정종, 태종 실록을 개수 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은 2년 11월 11일에 왕위를 동생인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그 뒤 그는 20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다가 세종 원년인 1419년 9월에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호는 공정이었고, 존호는 처음에 온인순효였고, 숙종 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으로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있다.

 

 

정조실록의 내용은...

' 정종의 초명은 방과 자는 광원이었으나, 즉위한 뒤 이름을 경으로 고쳤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 황후 한씨이다. 태조 7년인 1398년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 방석이 죽자 대신 세자로 책봉되었고, 동년 9우러5일 태조의 선양을 받아 제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정종은 일찍부터 관직에 나아가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고, 1390년 1월에는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추충여절익위공신에 책록되고, 밀직부사에 올랐다.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1392년인 태조1년 영야군에 봉해졌고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 병웍을 잡기도 하였다. 1398년 8월 정아군 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 뒤 태종의 추천으로 세자가 되었다가, 9월에 태조의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정종은 원년인 1399년 3월에 조정을 다시 개겨으로 옯겼다.  같은 해 8월에는 분경급니법을 제정하여 권세가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하였고,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햐약제생집성방>을 간행해였다. 11월에는 조례사정도감을 설치하였다. 

1400년 1월에 제2차 왕자의난이 일어나 저안군이 조정의 주도권을 잡자 그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해 4월에는 분란이 많았던 사병을 혁파하고 국가의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이어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권을 가진자들이 의정부에 합세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모두 태종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정종은 2년 11월 11일 왕위를 동생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그 뒤 그는 20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다가 세종 원년인 1419년 9월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의 태실 이야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태실 및 태실비로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봉안하고 있다. 정종은 즉위한 원년에 태실을 사두혈의 명당으로 이름난 이곳 직지사 대중전 뒤 북봉에 안치하고, 태실을 수호하는 수호 사찰로 직지사를 지정했다.
정종의 태실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 직지사 대웅전 북쪽 뒷산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에 위치한다. 이곳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황악산에서 뻗어 내려오던 주맥이 태봉 아래에서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솟아 있다.  외형상으로도 삼각 형태로 전형적인 태봉이 갖추어야할 조건을 모두 갖고 있는 1등지 태봉이다.
이후 왕실과 직지사의 보호를 받아오던 정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태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미명 아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전됐다. 그 후 태실지는 방치되고 중동석과 지주석은 직지사 경내에 흩어져 있다.

 

정종 태실 중동석

 

정종대왕 태실 터는 '태봉'이라고도 하며, 태실 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개첨석과 중동석은 지지사 경내에 옮겨져 있다. 그리고 직지성보박물관 내에는 난간석 2기가 전시돼 있다
태실석은 방형의 아래 받침돌 위에 팔각형의 이중기단과 팔각형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덟면을 부드럽게 마무리한 지붕돌이 덮혀 있다. 대게 다른 태실은 몸돌이 계란형 또는 원형이지만 정종 태실의 몸돌은 팔각형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종 태항아리

원래의 태실은 난간석을 이루는 기둥은 상부를 원추형으로 다듬고, 3단으로 된 테두리는 돋을새김하고 마지막 단은 여주문으로 처리한 형태였다. 기둥 양옆은 난간을 가로지르는 횡죽석을 얹을 수 있도록 돌기되어 있다.
정종의 어태를 김천의 직지사 뒷산에 안치하였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종 즉위년(1399년)에 금산 왕악산 직지사의 북쪽 봉우리에 어태를 안치했고, 이를 기하여 금산현을 군으로 승격하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왕실의 태실이 왕의 즉위년에 조성되기 시작한것은 정종 때 부터 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왕의 즉위 후 태실을 조성하였다. 왕권, 그 권세를 드높이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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