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어머니다. 연산군 때 올린 시호는 제헌왕후(齊獻王后)였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削奪)되었다. 묘호는 회묘(懷墓).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추존된 왕비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미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성종이 책봉한 정실 왕후였기 때문에 이것은 맞지 않다. 추존(追尊)은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 해당 지위에 없었던 인물에게 그 지위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의 성종의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 왕후에 오른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지나친 욕심으로 폐위가 되고 사약을 받고 죽기까지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 비극은 그녀가 아들 연산군을 더욱 포악하게 만들게 된다.
성종의 계비로서 폐비가 된 제헌황후 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그의 둘째 부인 신씨의 딸로 1455년인 세조1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윤기견은 경서와 문학에 밝아 집현전에 출입하였고 판봉상시사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는 1473년인 성종 4년에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봉했졌고, 세조의 후비인 대왕대비와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성종5년에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 성종 7년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윤씨에게 다가올 엄청난 비극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나. 많은 후궁들 속에 빠진성종의 호색 기질은 이미 윤씨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다.
성종의 첫째 부인 공혜왕수 한씨의 죽음도 성종의 바라기가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둘째 딸로 1467년 세조13년인 열두 살때 성종과 가례를 올렸고 성종의 숙부인 예종의 부인 장순왕수와 자매지간이었으므로 왕실에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였다. 언니 장순왕후는 세자빈 시절 원손을 낳다가 1461년 세조7년에 17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종보다 두 살 많은 공혜왕수 한씨는 성종이 후궁을 들일 때 후궁들에게 줄 옷을 손수 장만하여 하사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내명부의 어른으로서 질투심을 누르며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 그러나 후궁 윤씨가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고, 한씨는 1474년 성종5년 4월 19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씨가 죽은 뒤 1476년 성종7년 8월에 제헌왕후 윤씨가 왕비에 올랐고 3개월 뒤 아들 연산군이 태어났다.
윤씨가 왕비가 되고 보니 성종은 윤씨의 처소에 발길이 뜸해지면서 소용 정씨와 엄씨의 처소 출입이 잦았다. 그녀들은 성종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제헌왕후 윤씨를 별로 탐탐치 않게 여기고 있던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접근했다. 인수대비까지 합세하여 홀대함으로써 제헌왕후 윤씨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기만 했다. 칠거지악-아내를 내쫓는 일곱가지 이유- 중 '질투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는 여간 힘들지 않았겠으나 그래도 끝까지 참았으면 원자인 연산군인 있었기에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역시 그녀도 여자이기에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 했던 것이다.
윤씨는 성종의 총애를 되찾기로 마음먹게 된다. 우선 후궁들을 없애기 위해 어머니 신씨가 일러준 민간비방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소장방자'라는 처방으로 성종이 자주 출입하는 후궁의 처소 길목에 시신의 뼈를 묻어두면 그 길을 밟고 다니는 후궁들이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처방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어서 윤씨는 소용 정씨와 엄씨가 내통하여 자신과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의 투서를 만들어 감찰상궁 명의로 숙의 권씨이게 보내어 공개되자 궁궐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성종은 중종을 낳은 숙의 윤씨(정현왕후)를 비롯하여 내명부로 봉한 10여명의 후궁들을 중전 뜨락에 모아놓고 문초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초를 하여도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며칠 뒤 성종이 윤씨의 처소에서 투서와 같은 종류의 종이를 발견함과 아울러 비사오가 방양비첩(푸닥거리 비방책)까지 나와 윤씨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성종은 윤씨의 폐위 문제를 여러 차례 거론했으나, 매번 원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조정의 대신들이 반대했다.
성종은 사건의 결론을 얻지 못하자 윤씨에게 비상을 바친 시녀 삼월이를 처형하고 그녀의 어머니 신씨의 직첩(조정에서 외명부에 내린 벼슬)을 회수하여 궁궐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끝내었다.
성종은 많은 후궁 속에 묻혀 살았는데, 특히 요염하고 미색을 갖춘 정 소용의 잦은데 반발한 윤씨가 성종의 용안(얼굴)에 손톱 자국을 냄으로써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확대되었다.
인수대비 한씨는 성종에게 윤씨를 폐비시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성조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조정의 원로 대신들과 승지들의 찬반론이 엇갈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1479년인 성종 10년 6월 성종은 윤씨를 폐서인하여 윤씨의 어머니 신씨가 사는 사가로 쫓아냈고 친정으로 쫓려난 윤씨는 바깥 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씨와 빈곤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폐비 윤씨를 쫓아낸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중전의 빈 자리를 메울 새며느리를 자신이 직접 고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간택의 결정 권한은 시어머니인 대왕대비가 쥐고 있었다. 인수대비는 자신이 마음에 둔 정 소용을 먼저 적고 후궁 몇 사람을 적은 간택 단지를 들고 대왕대비전 들어갔다. 그러나 일은 이수대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작 왕비로 승격된 후궁은 19세의 숙의 윤씨였다.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결정을 내렸다. 폐비 윤씨를 몰아내는데 일조했던 후궁을 왕비로 삼을 경우 윤씨의 폐비에 반대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말썽이 없었던 숙의 윤씨를 선택했던 것이다.
1480년인 성종 11년 11월, 성종의 나이 15세, 새로운 왕비의 나이 19세였다.
친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비참히 살아가고 있을 무렵인 1482년 성종 11년 정월 연산군이 일곱살 때 세자 책봉 논의와 함께 폐비 윤씨의 동정론이 있었으나, 윤씨의 폐비에 앞장섰던 소용 엄씨. 정씨와 인수대비 한씨 등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어싿. 이때 소용 정씨와 엄씨는 성종에게 윤씨가 궁궐에서 10년 먹을 재물을 가지고 나갔다고 거짓을 고하기까지 했다.
그해 8월 성종은 은밀히 내시 안중경을 시켜 폐비 윤씨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3년 동안 회한의 눈물로 지내며 그신해 온 폐비 윤씨와 어머니 신씨는 오랜만에 찾아온 내시 안중경을 반갑게 맞으며 가사의 눈물을 흘렸다.
"상가몌 성은이 망극하다고 전하오. 부디 만수무강하시랍시라고 페서인은 늘 상감마마의 만수무강을 기원할 뿐이오"
그러나 폐비 윤씨를 찾아간 안중경에게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내시를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인수대비는 시퍼렇게 설쳤다.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이로다. 폐지를 복위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수대비는 안중경을 대비전에 은밀히 불러들여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도록 강압했다.
"폐비는 아직도 위우치는 빛은 조금도 없이 곱게 단장하고 온갖 교만을 부리며서 발악하더라고 상주하라."명하였고
안중경은 인수대비가 시킨 대로 성종에게 허위 보고하게 되었다.
"폐비 윤씨는 아직도 뉘우치는 빛이 없사오며 곱게 꾸미고 교만을 부리면서 원자 아기가 장성하면 궁중에 호된 바람이 불 것이라며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안중경의 충격적인 보고를 듣고, 성종은 1482년 성종13년 8월 조정 대신들과 상의하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8월16일 폐비의 사저에 내관과 좌승지 이세좌. 이극균이 사약을 들고 찾아왔다.
폐비 윤씨와 어머니 신씨는 이제야 궁궐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그러나 뜻밖에도 이세좌가 떨리는 목소리로 교지를 읽자 폐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신씨는 물론 사약을 들고 온 승지와 내관들도 울었다. 잠시 후 윤씨는 약사발을 들었다. 시뻘건 피가 금산 소매에 뿌려졌다. 그녀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어머니,.... 이 피 묻은 소매..... 간수하셨다가 원자에게 원통한 내 사연과 함께 전해 주십시오."
폐비 윤씨는 동대문 밖에 묻혔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에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서 '윤씨묘지'라는 묘비명을 7년 만에 내렸다. 1494년 성종 25년 12월 성종은 자신의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윤씨 문제에 관해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자~~이 이야기를 읽으며 성종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성종은 괜찮은 사람이였을까? 그는 분명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이였다. 하지만 한 사람으로써의 그를 생각하면 과연 성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역사를 읽어 내려갈때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다.
이제 이로인한 비극은 아들 연산군으로 이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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