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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오리 이원익, 대동법을 완성하다 이원익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를 규정하는 대표적 특징을 알려준다. 그는 87세로 매우 장수했고, 그런 까닭에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과 인조 반정(76세, 영의정), 정묘호란(80세, 영중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통과했다. 나이와 관직이 보여주듯이 그는 그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지위와 임무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의 일상은 평온보다는 변화와 격동에 지배되기 쉽다.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기도 하고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중기는 뛰어난 인물들이 특히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조건은 특히 가혹했다.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그런 국면을 헤쳐간 .. 2020. 5. 11.
광해군의 중립외교 - 강홍립장군 (사흐루전투) 강홍립은 1560(명종 15)∼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후금을 쳤으나 대패하였다. 후금에 억류되었다 정묘호란 때 입국하여 조선과 후금의 강화를 주선하였으나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1560년 병조참판 강신(姜紳)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강온(姜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 아버지는 참판 강신(姜紳), 어머니는 정유의(鄭惟義)의 딸이다.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 강사상(姜士尙)의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고, 아버지 강신은 정여립의 역모를 평정하여 평난공신에 책록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 2020. 5. 10.
광해군 - 인목대비 폐하다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왕비. 계비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 생모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폐위되는 불운에 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인조반정으로 명예를 회복한 대비는 바로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를 지칭하는 말이다.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에게 시집을 와서 선조가 그토록 바랐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영창대군은 그녀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태어나 1602년(선조 35) 선조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당시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 선조의 나이는 51세로, 당시까지는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과 계비였다. 선조는 의인왕후 사.. 2020. 5. 9.
광해군, 대동법 시행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이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공물의 이런 폐단을 이용한 관리나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배씩 가중하여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防納:代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더구나 거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을 배정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의 모리 행위는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지만 오히려 국가 수입은 감소되었다. 결국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조세제도는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이었다. 17세기 초.. 2020. 5. 8.
광해군시대 사건 - 회퇴변척 회퇴변척은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배척한 일이다.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 2020. 5. 7.
선조시대 인물 - 한석봉 한호는 조선 최고의 명필가이다. ‘석봉’이라는 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가지 서체(글자체)에 두루 능했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로 명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이며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능했다고 한다. 《서경덕신도비》, 《행주승전비》 등 비문이 주로 남아 있다.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한호는 1543년에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과 글씨 쓰기를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 서당을 다니기 힘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 2020. 5. 6.
광해군시대 관련 사건 - 계축옥사 ( 칠서지옥 ) 계축옥사는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다. 계축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축옥사라 하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1608년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소북파를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 및 그 측근에 박해를 가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 2020. 5. 5.
광해군일기 는 조선왕조 제 15대 왕이었던 광해군 1575년에서 1641년의 재위 15년 2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15년간 왕으로 재위하였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는 모두 187개월간에 걸친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서에 의하여 편년체로 서술되었다. 각 달마다 한권씩으로 편철하여 재위기간 187개월 분이 총 187권으로 구성되었다. 는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의 편찬에 참여한 전후 찬수청 관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좌의정 윤방, 도청당상-이정귀, 김유, 도청낭청-이식.이명한.이경여.유백중.김시야.정백창.정홍명.김세렴.김육, 일반.. 2020. 5. 4.
선조의 장자 임해군 임해군은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이자 맏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진(李珒), 자(字)는 진국(鎭國). 어머니는 사도시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딸이다.성품이 사나워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순화군(順化君)과 동북지방으로 피난 가서 가토[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이 모해하여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ㆍ김제남(金悌男 : 인목대비의 아버지)과 함께 역모죄(逆謀罪)로 몰려 살해되었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비참한.. 2020.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