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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하멜이 본 조선 < 하멜표류기> 조선 중기에 조선에 14년간 머물다 간 네덜란드 선원이다.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으로 인해 제주도에 불시착했으며, 고국에 돌아가 조선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 《하멜 표류기》를 펴냈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큄(Gorcum)이라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호르큄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라인강의 지류인 왈강이 네덜란드 운하와 연결되어 있어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의 왕래가 잦았으며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하멜의 가족은 대대로 호르큄에서 살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 걸쳐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헨드릭 하멜은 1651.. 2020. 6. 13.
효종에서 숙종으로 < 북벌론 > 조선의 군사력을 길러 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효종 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계획으로 마련되어 숙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청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면서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계획이었지만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게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전쟁 준비를 하긴 했으나(이는 실록에서도 꽤 보인다.)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의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 2020. 6. 12.
효종 북벌의 꿈 그리고 동반자 송시열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주요 저서에는 《송자대전》 등이 있다.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그.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이.. 2020. 6. 11.
조선 17대 왕 효종 - 이호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의 휘(諱)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부인은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이다.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효종은 인.. 2020. 6. 10.
효종 실록 은 조선왕조 제17대 왕인 효종 1619년 5월에서 1659년 5월의 재위기간 10년간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으로, 정식 명칭은 이다. 은 본문 21권 21책과 효종의 행장, 지문, 시책문, 애책문 등이 수록된 부록을 합쳐 총22책으로 구성되었다. 활자로 간행되었으며, 조서왕조 다른 실록들과 합쳐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은 효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660년 현종1년 5월에 시작하여 익년 2월에 완성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 관원은 아래와 같다. 총재과 - 영춘추관사 이경석, 도청당상 - 지춘추관사 홍명하 , 채유후, 동지춘추관사 - 이일상, 도창낭청 - 목겸선, 조귀석,심세정, 김수흥, 지춘추관사 - 허적, 동춘추관사 - 김수향 등이다. 묘호는 효종, 존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이며,.. 2020. 6. 8.
삼전도의굴욕 - 인조의 굴욕과 나라의 슬픔 조선은 청의 주장대로 군신 관계를 수립하고,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홍익한, 윤집, 오달제 - 삼학사)가 인질로 잡혀가게 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호란의 영향으로는 청의 침입로였던 서북 지방이 황폐화되었고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1) 최명길의 주화론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늘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 2020. 6. 4.
김자점, 인조반정의 공신? 나라의 역적!! 김자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귀 등과 인조반정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 사림세력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본관 안동.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성혼(成渾)의 문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金礩)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이다.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2020. 6. 3.
남한산성 45일간의 전투 남한산성 전투는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10일부터 2월 24일까지 45일 동안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청나라 군대에 맞서서 인조(仁祖)와 조선의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였으나, 포위되어 고립되자 항복하였다 1636년 12월 28일 선양[瀋陽]을 출발한 청나라 군대의 주력은 1637년 1월 5일 압록강 북안의 진강(鎭江)을 거쳐 조선으로 진입했다. 청나라 군대는 정묘호란 때와는 달리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 평양의 자모산성(慈母山城),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 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향했다. 때문에 조선의 조정은 청나라 군이 개성 부근에 이르른 1월 8일에서야 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이미 개성 부근까지 남하했다.. 2020. 6. 1.
인조시대 백마산성 임경업 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청북방어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고 명, 청군에도 명성이 높았다. 명나라에 망명하여 청나라와 싸우다 생포되었으며,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되어 형틀에서 장살되었다. 임경업은 1594년 충주(忠州) 달천(達川)에 출생하였고 부친은 임황(林篁)이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자 영백(英伯). 호 고송(孤松). 시호 충민(忠愍)이다.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면서(1616년) 왕조 교체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임경업이 급제한.. 2020.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