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야기284 조선시대 최악의 재앙 < 경신 대기근 >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대기근이다.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으며, 임진왜란 때부터 살아온 늙은이들이 ‘전쟁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경신 대기근의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당시 조선 인구의 1200~1400만 명중 약 90만에서 150만 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을 살펴보면 1670년 한 해동안 온갖 자연재해가 집중해서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671년에 조정에서 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죽어갔음을 알 수 있다. 경신 대기근은 소빙기로 인한 17세기의 범세계.. 2020. 6. 28. 남인(南人)의 영수, 고학(古學)에 심취하다 < 허 목 > 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학문적으로도 독특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古學)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후기 강성 정치인의 면모를 뚜렷이 갖추었으면서도 개성 있는 학문세계를 추구한 허목의 학문과 정치활동 속으로 들어가 본다. 허목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 2020. 6. 27. 일생을 당쟁으로 살던 < 고산 윤선도 >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는 서울 출생.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惟幾)의 양자이다.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살았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 성균관 유생에게 시행하던 시험)에 1등을 했으며 향시(鄕試)와 진사시(進士.. 2020. 6. 26. 2차 예송논쟁 - 갑인예송 2차(갑인예송)는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이다.(현종 15년) 1차 논쟁 때 말싸움은 이겼지만 하마터면 역적으로 몰릴 뻔 했던 서인들이 이번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정권을 내놓는 것은 물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송시열까지 도태되는 대사건으로 번졌다. 남인이 승리한다. 예송논쟁은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상징성이 엄청났던 사건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한 복식 정도였지만, 배경적으로는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 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효종의 정통성과 맞물려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실제 송시열이 체이부정.. 2020. 6. 23. 현종 즉위 후 일어 난 예송논쟁 - 1차 예송 논쟁 1차 예송 논쟁은 현종 즉위 시기 자의대비의 상례 절차인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정치적 분쟁이다. 왕위에 오른 현종과 신하들은 나라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를 세우려고 했었다. 보통 예절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잘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 더 많았다. 신분이 낮은 백성이 신분이 높은 양반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다는 식이였던거다. 그럼 사회에는 질서가 생기고, 높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을 다스리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왕과 신하들이 예절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였다. 그래서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를 정하는 것은 무척 예민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첫째 아들(맏아들)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는 것으로 사회 분위기가.. 2020. 6. 22. 조선 18대 왕 현종 - 이 연 효종은 조선시대 제18대 왕(재위 1659∼1674)으로 효종의 아들이다. 효종의 상례(喪禮)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을 채택하고,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2차 복상문제에서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 재위 중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다. 현종의 재위 기간은 1659∼1674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원(李棩)이다. 이름으로 쓰이는 한자는 ‘굽을 연’자로 쓰이지만, 〈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6년 9월 9일)에는 이름의 음이 ‘집 원(院)’자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는 경직(景直)으로 효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 2020. 6. 20. 조선왕조실록 < 현종실록 > 은 조선왕조 제 18대 왕 현종의 재위기간인 1659년 5월에서 1674년 8월까지 1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이다. 현종실록은 두 종류가 편찬. 간행되었는데 과 이 그것이다. 은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던 숙종 1~3년에 편찬되어 모두 22권으로 간행되었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 6~9년에 28권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은 현종이 세상을 떠난 익년 숙종 1년인 1675년 5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실록청이 설치되고 영의정 허적이 총재관이 되어 숙종 3년 2월에는 당상과 낭청의 인원을 늘리고 편찬에 박차를 가하여 6월 9일에 찬수를 마쳤다. 실록의 출간을 앞두고 허적이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여 숙종 3년 5월 10일.. 2020. 6. 20. < 숭명배청 >의 상징 김상헌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1652〔효종 3〕)은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핵심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일 것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가 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82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김상헌은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다. 전쟁으로 목숨까지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가 특별히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노령에 청의 심양(瀋陽)까지 압송된 것을 포함한 여러 사실은 그가 적지 않은 육체적ㆍ정신적 역경을 거쳤음을 수긍하게 만든다. 그 시대에 그의 판단과 처신이 옳았는가 하는 측면은, 거의 모든 사안이 그렇듯이,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명료한 이념을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이념.. 2020. 6. 18. 청나라에 파병을 <나선 정벌> 나선 전쟁이란 조선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조선군사(총수병)가 청나라 군사와 함께 정벌한 일을 말한다. 나선(羅禪)은 러시아(Russia)를 지칭한다. 조선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여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벌인 전투. 나선정벌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용어로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청-러시아 국경분쟁'을 표제어로 쓰고 있다. 나선 전쟁의 배경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이어 루스 차르국(이하 러시아)은 이반 4세 때 유럽으로 진출하고자 리보니아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하자 세력을 기르기 위해 모피무역을 선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보니아 전쟁 이전 시베리아 진출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자 러시아 정부는.. 2020. 6. 14.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