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284

사도세자의 방탕생활 3. 1761년 영조 37년 4월 동궁의 시종들과 세자빈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안감사 정휘량의 감언에 따라 세자는 평양으로 떠났다. 물론 영조의 윤허도 없이 몰래 떠난 것이었다. 20일 만에 돌아온 세자에게 동궁의 유선 서지수, 대사성 서명응, 장령 윤재겸 등이 부왕을 만나 요서를 빌라고 건의하였으니 세자는 이들에게 폭언을 퍼붓자 세자의 장인인 우의정 홍봉한이 울면서 건의하였다.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부왕을 만났다. 겉으로는 평양을 다녀온 문제는 수습되는 듯했다. 당시 영조는 여러 후궁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젊고 발랄한 문 숙의도 있었지만 새 중전 김씨에게 한동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는 문 숙의의 처소를 찾았다. 이때 숙의 문씨는 영조에게 아양을 떨었다. "전화, 신첩의 소원은 나라 안의 명승.. 2020. 9. 3.
사도세자의 방탕생활 2. 1752년 영조 28년 3월 영조와 세자 부자 간이 계속 반목하던 중에 세 살 된 세손이 죽었다. 임금은 세자 선은 의중에 두지 않았고 오직 왕세손에게 온갖 기대를 걸었는데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났다. 이 해 9월 세자빈 홍씨가 두 번째 왕손을 낳았으니 뒤에 22대 왕 정조가 되는 세손이었다. 영조와 세작 간에 갈등이 계속되자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환수했다. 세자는 멍에를 벗어 버린 듯 홀가분했고 한편 허전하기도 했다. 그때 만난 여인이 16세의 나인 임씨였다. 세자는 임씨에게 욕망을 불태웠다. 세자로서는 세자빈 외에 처음으로 접촉하는 여인이었다. 승휘 임씨는 그 뒤 숙빈으로 봉함을 받았고 뒤에 두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녀가 낳은 은언군 인과 은신군 진, 두 왕자 중 은언군은 청종의 조부가 되고 .. 2020. 9. 2.
사도세자의 방탕 생활 1. 1744년 영조 20년 1월 세자가 열 살이 되자 동갑인 홍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홍씨는 홍봉한의 딸로 1735년 영조 11년 6월에 태어났고 이 여인이 후일 혜빈으로 봉해지는 혜경궁 홍시로서 정조의 어머니다. 세자빈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그 해 자신을 위해 특별히 실시된 문관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고, 그 뒤 영의정까지 올라 노론의 거두가 되었다. 1747년 영조 23년 12월 세자가 13세 때 조세를 체납한 백성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벌어졌는데 겨울 찬 바람이 몰아치는 감옥에 체납자들을 몰아넣고는 발가벗겨 추위에 시달리게 하는 잔혹한 방법을 썼다. 영조는 형조판서 이종서에게 대신들과 상의하여 다른 방법을 쓰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때 대신들 앞에서 세자가 겁 없이 엉뚱한 반박 질문을 던졌다. .. 2020. 9. 2.
실학의 선구자 <안정복> 안정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성리학자로,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에게는 동사강목이라는 역사서로 유명하다. 여용국전이라는 소설도 썼다.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안정복은 제천(提川) 출신이며 안신행(安信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안서우(安瑞羽)이고, 아버지는 증 오위도총부부총관 안극(安極)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고려조에 태조를 도와 가문을 연 안방걸(安邦傑)로부터 대대로 중앙의 고급관료를 지냈으나, 안정복의 가까운 선조에 이르러 영락하였다. 고조 안시성(安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다. 조부대에 이르면 남인의 정치적인 입.. 2020. 9. 1.
영조가 이룬 <탕평책> 과 업적들 조선 후기에는 정치하는 사람들 간에 서로 무리를 지으며 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정치 무리를 ‘붕당’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붕당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편을 서로 인정해 주며 사이좋게 정치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대 당에 대한 올바른 비판은 사라지고, 점차 모함이나 부정적인 비판으로 바뀌면서 붕당 간의 정치적 싸움이 치열해지기 시작하게 된다. 영조 임금은 신하들끼리 편을 갈라 자기들만의 이익을 좇는 상황이 왕권을 약하게 만들고 조선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붕당 간의 싸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하기로 한다. 그 정책이 바로 '탕평책'이다. 탕평책은 영조가 서로 다른 무리의 신하들이 골고루 벼슬을 할 수 있도록 인재를 고르게 등용한 정책이었다. 영조는 세제 때부터 탕평책을.. 2020. 8. 29.
영조가 사랑했던 <화평옹주>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제21대 왕 영조의 서녀이며, 생모는 영빈 이씨이다. 정조와 의소세손의 고모가 된다. 1727년, 4월 27일(양력 6월 16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사도세자의 친누나이다. 영조의 서3녀이자 영빈 이씨의 1남 3녀 중 장녀이다. 화완옹주와 화협옹주의 동복 언니이고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이며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시누이가 된다. 영조가 자식들 중 특히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유독 총애했던 것은 유명하다. 1731년(영조 7) 마마를 앓아 영조가 모든 형의 집행을 정지시켰다. 1738년(영조 14) 12세의 나이에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 2020. 8. 28.
단종, 세조 시대 관련 인물 1. 권람 - 조선전기 의정부우찬성, 좌찬성,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검교정승 권희(權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권근(權近), 아버지는 우찬성 권제(權踶), 어머니는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 2020. 8. 27.
혜경궁 홍씨의 그날의 기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의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빈(嬪)으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의 생모이다. 생전의 존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이며 사후의 시호는 헌경(獻敬)이다.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아들인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750년(영조 26) 장남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1814)와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를 낳았다. 하지만 맏아들인 .. 2020. 8. 26.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 2020.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