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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정조의 효심이 담긴 < 화성 행궁 과 융건릉 >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효심이 각별했던 임금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 보여준 지극한 효심은 백성에게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는 비명에 숨져간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겨 묘호를 바로 세우는 등 선친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1년에도 수차례 능 참배길에 나섰고 가식 없는 효심으로 백성을 감복시켰다. 정조는 사후에도 부친의 능이 있는 지금의 화성시 화산 기슭에 묻혔다. 수원시 교외 약 8km쯤에 자리잡은 융건릉(隆健陵 사적206호)은 부친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한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에 들어 있어 모두 서향이다. 융건릉과 함께 들러 보아야 할 곳으로 기복사인 용주사가 있다... 2020. 9. 14.
정조의 업적3 1. 규장각 설치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 갔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일시 설치되었으나 폐지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세조가 친히 쓴 ‘奎章閣(규장각)’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고 역대 국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설립되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정조는 “승정.. 2020. 9. 10.
정조의 업적 2 ( 장용영 설치, 수원화성 건설 ) 1.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 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1785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1788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친위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바로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이 이상 도시의 건설을 통해 .. 2020. 9. 9.
정조의 업적 1 ( 탕평책, 신해통공, 문체반정 ) 즉위하자마자 문화 정치의 표방을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작성지화의 명분으로 초계 문신제를 실시하는 등 인재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1. 탕평책 - 준론탕평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는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 때는 혼인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완론 탕평이 사실상 무너지고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가 되었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는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준엄한 의리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탕평을 펼치게 된다. 사.. 2020. 9. 9.
홍영국의 세도정치 정조는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성왕조 2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중음을 복수하는 한편 조정의 파당을 없애고 새로운 사람들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한편 홍국영을 몹시 신임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을 돕게 하였다. 홍국영과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홍국영은 세손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으며, 항상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어느 날 세손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영조에게 세손이 의 '요아편'을 읽는다고 무고하였다. 영조가 이 책을 읽지 말도록 당부했으나 세손은 궁금하여 어느 날 몰래 펼쳐 보았다. 그 책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셨으니 그 깊은 은혜 갚고자 할진대 하.. 2020. 9. 7.
정조의 최측근이자 최고의 실권자 <홍국영> 홍국영은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48년 홍낙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왕명.. 2020. 9. 6.
조선 22대 왕 < 정조 이산> 정조 이산은 조선후기 제22대(재위: 1776~1800) 왕이다. 재위 1776∼1800. 이름은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조선의 제22대왕 정조,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될 때까지는 왕가의 일반적인 코스를 밟으며 순탄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1762년 생부 사도세자(후일의 장헌세자, 고종때 장조로 추존됨)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지난한 여정을 거쳤다. 생부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의 나이 11살이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정한 정치판 위에서 끝내.. 2020. 9. 5.
정조실록 은 조선왕조 제22대 왕이었던 정조의 재위 기간인 1776년 3월에서 1800년 6월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조의 본디 묘호는 정종이었으므로 그 실록의 본디 이름도 으로 약칭이라 하였다. 광무 3년인 1899년에 묘호를 추종 개정함으로써 그 실록도 으로 부르게 되었다. 본서 54권과 부록 2권을 합쳐 모두 56권 5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익년인 순조 즉위년인 1800년 12월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순조 5년인 1805년 8월에 완성하였다. 정조 대에는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실록 편찬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며 그 편찬 경위도 다른 실록의 편찬 사례와 대체로 같았다. 실록청 총재관에는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서매수 등 4명이 임명되어 편찬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2020. 9. 4.
나경언의 고변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중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 외에도 역적모의를 꾀한다고 무고했다. 이는 소론 일파의 재기를 우려한 노론의 발상이었다. 휘녕전에 엎드린 세자는 끝내 역적모의를 부인하자 영조는 요천검을 내려 자결하라고 명했다. 임금과 세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영의정 홍봉한은 파직되고 후임으로 신만이 임명되었다. 신만이 임금에게 자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자 영조는 살기등등하여 그에게 세자보다 먼저 죽고 싶으냐고 호통쳤다. 마지막으로 임덕재가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 했으나 역시 쫓겨나고 말았다. 덕성합에서 이 살벌한 소식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있던 세자빈 홍씨는 통곡하였고 세손도 울면서 어머니 .. 2020.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