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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조선 24대 왕 헌종 < 이환 > 헌종은 조선 제24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며,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성황제(成皇帝), 휘는 환(烉), 자는 문응(文應)이다.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이다.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안동 김씨 세도가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첫 왕비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김씨였으나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 2020. 10. 15.
조선왕조실록 < 헌종실록 > 은 조선왕조 제24대 왕 헌종의 재위 기간인 1834년 11월에서 1849년 6월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이다. 본문은 16권 8책이며, 행록. 애책문 등으로 수록한 부록이 1책이다. 활자로 간행되었으며,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편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 : 조인영, 정원용, 권돈인, 김도희, 박희수, 김픙근, 박영원, 도청당상 : 조두순, 서기순, 찬수당상 : 김좌근, 이가우, 윤정현, 김학성, 조학두, 김보근, 도병준, 김수근, 이경재, 김정집 교수당상 : 서헌순, 김병기 등이다. 헌종은 1849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존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 묘호는 헌종,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2020. 10. 12.
순조가 사랑한 아들 < 효명세자 > 효명은 효명세자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純元)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1809년(순조 9) 8월 9일에 탄생했다. 3세 때 이름을 영(旲. 원래 발음은 ‘대’지만 ‘영’으로 부르도록 했다)이라고 정하고(1812년 6월 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7월 6일).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은 세자의 휘와 같다는 이유에서 이름을 ‘이양(履陽)’으로 고치기도 했다(8월 21일).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고(8세. 1817년 3월 11일) 관례(冠禮- 성년식)를 거행했다(10세. 1819년 3월 20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세자의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효명세자는 18세인 1827년 2월 부왕 순조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었다. 뒤에서 보듯이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었.. 2020. 10. 7.
농민의 반란 < 홍경래의 난 > 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다. 홍경래의 본관은 남양(南陽). 용강(龍岡) 출신.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학문을 배웠고,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낙방했으나 과거를 치를 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녔다. 그와 함께 병서(兵書)나 제반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鄭鑑錄)』 등에 통달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뒤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상,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가산에서 풍수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뜻이.. 2020. 9. 28.
조선 쇄퇴의 시작 < 세도정치 > 세도정치란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이다.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볼 때 국정의 정점에 있어야 할 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세도(世道)란 ‘세상 가운데의 도리’란 뜻으로서, ‘그 도리를 이끌어나갈 책임’을 함께 뜻하기도 했다. 세도의 책임은 원래 국왕에게 있어야 하지만, 조선후기에 신료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유학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산림(山林)이 세도의 담당자로 지목되곤 하였다. 19세기의 권세가는 위와 같은 논리에서 합리화되었으며, 그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하던 황현(黃玹), 안확(安廓) 등의 논자들이 세도(世道)를 세도(勢道)로 바꾸어 표현함에 따라 세도정치의 용어가 성립하게 되었다. 국왕의 외척 .. 2020. 9. 25.
조선의 23대 왕 순조 < 이공 > 순조 이공은 이름 공(玜).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1805년 사망시까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뒷배로서 수행했고 신유박해 등 천주교 박해 사건을 크게 일으키기도 하여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상산군부인 송.. 2020. 9. 22.
조선왕조실록 < 순조실록 > 은 조선왕조 제23대 욍이었던 순조의 재위기간인 1800년 7월에서 1834년 11월인 34년 5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본서 34권 34책과 부록 2책을 포함하여 모두 3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순조의 본디 묘호는 순종이었고, 그 실록의 명칭도 으로 약칭 이라 하였다. 1857년 철종8년 8월에 묘호를 순조로 춘존하면서 실록을 으로 개칭하에 되었다. 댜른 왕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은 헌종 원년인 1835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헌종 4년 1838에 완성하였다. 총재관에는 이상황, 심상규, 홍석주, 박종훈, 이지연 등이 임명되어 편찬을 주관하였다. 순조는 1834년 11월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존호는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현경성효이며, 묘호는 처음 순종을 지정.. 2020. 9. 20.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 도시 수원 <현릉원 > 1789년 정조 13년 7월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이 양주으 배봉산 기슭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다녀와서 상소을 올렸다. "뱀 등이 묘지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망주석은 쓰러져 있고 봉분에는 억새불이 돋아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박명원 상소문을 읽은 정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왕의 아버지의 묘가 이 지경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그날의 기록 정조는 조정의 대신들을 희정당에 불러 승지로 하여금 박명원의 상소를 대신 읽게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정조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정조는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그 장소는 수원부의 관청 뒤쪽으로 정하고 서유방을 경기관찰사로, 조심태극 수원부사에 임명하여 이장에 대한 일을 맡겼다. 사도세자의 이장은 신속하게 처리.. 2020. 9. 17.
정조 꿈을 이루어 준 정약용 < 수원화성 > 정약용은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약용의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 2020.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