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284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고달프고 가난해졌다 < 삼정의 문란 > 삼정은 전정과 군정, 환정(환곡)을 일컫는다. 전세 : 토지(밭)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조선 세종 때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1443년(세종 25년)에는 풍년과 흉년에 따라 수확량을 9단계로 나눈 연분 9등법이, 이듬해에는 밭의 비옥도에 따라 6단계로 구분한 전분 6등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복잡해 16세기 후반에는 밭 1결당 대략 곡식 4두-6두 정도를 거두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리들은 각종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토지에 전세 외에도 다양한 잡세를 부과했다. 여기에 향리와 수령들의 부정부패까지 겹쳐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증가했다. 군포 : 군역의 대가로 내는 포목(옷감)을 말한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대부분 군포를 내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지배층은 갖은 수를 써 자신.. 2020. 10. 29.
60년 세도정치 < 안동 김씨 > 세도정치란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으나, 척신(戚臣) 또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 교화원리로서의 세도는 조광조(趙光祖) 이래 정권을 담당한 사림이 실천해야 할 책무로서 자임한 정치형태였고, 이와 같은 정치자세의 정당성은 사림정치의 권위를 원칙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정조 초의 총신 홍국영이 정권을 담당한 이후 ‘世道政治’는 ‘勢道政治’로 타락, 변질되어 권세정치의 형태로 나타났다. 홍국영은 척신으로서 사도세자(이후 장헌세자)의 아들.. 2020. 10. 28.
강화도령 철종 이원범의 이런저런 이야기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조선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였고,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의 7촌 재당숙이자 순조의 5촌 조카인 이원범을 왕대비의 자격으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철종의 형 이욱은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의 설득으ㄹ로 결국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 유수가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집을.. 2020. 10. 27.
조선 25대 왕 철종 < 이변 > 철종은 조선후기 제25대(재위:1849~1863) 왕이다. 재위 1849∼1863.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변(李昪)이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서출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이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이광이다. 1786년.. 2020. 10. 24.
조선왕조실록 < 철종실록 > 은 조선왕조 제25대 왕 철종의 재위기간인 1849년6월에서 1863년 12월인 14년 7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읻. 정식 이름은 이다. 본문은 15권 8책이며, 행록, 시책문 등을 수록한 부록이 1책이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철종실록은 철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864년 4월 29일 북영에 실로겇ㅇ을 설치하고 총재관 등을 임명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의 주요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 : 정원용, 김흥근, 김좌근, 조두순, 이경재, 이유원, 김병학 각방 당상 : 김병기, 김병국, 홍재철, 윤치희, 조득림, 이돈영, 홍종응, 윤치정, 조석우, 이승익, 김보현, 조구하 등이다. 절종은 1863년 1.. 2020. 10. 23.
3차 천주교 박해 신부 김대건의 순교 < 병오박해 > 병오박해는 1846년(헌종 12) 김대건(金大建)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 입국해 있던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주교 페레올(Ferreol,J.J.)은 김대건과 함께 포교에 힘쓰는 한편, 우리 나라에 입국할 기회만을 노리며 만주에 머물러 있던 신부 메스트르(Maistre)와 최양업(崔良業)을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페레올은 종래의 잠입로였던 육로는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서해의 안전한 바닷길을 찾기 위해서 김대건을 황해도 서해안으로 보냈다. 김대건은 1846년 5월 13일서울을 떠나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해역으로 나가 청나라 배에 지도와 서신을 탁송하고, 귀로에 순위도에 들렀다가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 2020. 10. 20.
사랑의 증표 < 창덕궁 낙선재 > 창덕궁에 자리한 낙선재는 창덕궁 인정전의 동남쪽,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 잡은 건물로, 1847년(헌종 13) 건립되었다. ‘낙선(樂善; 선을 즐김)’이라는 명칭은 ‘인의충신(仁義忠信)으로 선을 즐기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天爵; 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는 《맹자》의 구절로부터 비롯되었다. 낙선재 오른쪽으로 1848년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의 처소로 건립된 석복헌과 1848년 중수된 수강재가 옆으로 길게 이어지며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어 이 일곽을 통틀어 낙선재라 부르기도 한다. 각 건물 사이에 행랑과 담을 설치하여 공간을 독립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건물 뒤쪽으로 화초·석물·꽃담·굴뚝 등으로 꾸민 아름다운 후원이 있고,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 등의 정자가 있다. 낙선재는 왕.. 2020. 10. 19.
사학토치령의 시작 천주교 박해 < 기해박해 >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로 기해사옥이라고도 한다. 1839년 3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되어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僻派)의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김대왕대비는 순조의 계증조모(繼曾祖母)이며 벽파에 속하였는데,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에 속했던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순조의 비로 삼자 정권을 빼앗겼다. 이 후 36년간에 걸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순조는 1827년 2월 28일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사를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장인이 조만영(趙萬永)이었고 당시 어영대장의 자리에 있었다... 2020. 10. 19.
짧지만 찬란했던 헌종 사랑 < 경빈 김씨 > 헌종이 짧지만 찬란하게 사랑했던 주인공은 경빈김씨이다. 경빈 김씨는 광산 김씨이며, 아버지는 김재청(金在淸), 어머니는 평산 신씨, 외할아버지는 신명하(申命河)이다.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자, 새로운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때 김씨도 참여했는데, 헌종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왕실 어른들은 홍씨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당시 결혼이란 당사자보다 어른들의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결국 홍씨가 계비(효정왕후)로 정해졌다. 대신 김씨는 헌종의 후궁이 되어 입궁했고, 경빈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김씨는 수빈 박씨의 예를 그대로 이어받아 무품입궐빈이었다고 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했고,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 2020.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