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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환국으로 왕권 강화 < 숙종의 업적 > 숙종은 수차례의 환국으로 조정 대신들을 교체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을 통해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이 붕괴되고 숙종은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절대적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의 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희생되었다. 숙종은 붕당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그 도구로 선택한 방식이 바로 ‘환국’이였다. 환국은 왕이 조정의 대신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걸 뜻한다. 이전까지의 왕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들을 모조리 바꿨다. 그러니 남인이 집권했다가 졸지에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상황이 연출되었 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여당이 있어도 야당이 여전히 목소리를 내면서 세력간에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 2020. 7. 11.
숙종 20년 갑술환국 갑술환국은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이다. * 조선왕조실록 그날의 기록 발단은 음력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서인 노소론이 함께 민심을 불안케 하는 풍문을 퍼뜨리고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서인 함이완의 밀고를 받으면서 일어났다.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에서 엄히 조사하고, 특별히 엄중한 형벌을 쓰라고 명하였다. 3월 25일 우윤 겸 포도대장이자 중전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가 소론과 왕래한 것을 사죄했으나 숙종은 되려 위로 했으며 뇌물 수수 혐의도 다음날 국문에서 부정되었다. 그리고 노론의 김춘택과 지방의 거부 출신 무인 이시도, 소론의 한중혁 부자 등이 줄줄이 끌려왔다. 이 과정에서 .. 2020. 7. 10.
숙종 15년 기사환국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 남인(南人)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이며 숙종대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환국이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王妃: 仁敬王后)로 맞았으나 1680년 10월에 왕비가 죽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 仁顯王后)로 맞았다. 그 때 김만기·민유중 등은 모두 노론계였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게 된다. 발단은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의 원호를 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호를 정한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숙종의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아직 강보에 싸인 후궁 소생의 왕자에.. 2020. 7. 8.
숙종 6년 경신환국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을 말한다. 숙종은 아버지인 현종이 예송논쟁에 휩싸여 신권에 끌려다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14살에 등극하자마자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나 증조할머니 장렬왕후 조씨의 수렴청정 없이 곧바로 친정을 하였다. 아래 꾸준히 언급되는 삼복(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남인과 가깝게 지냈으며, 복선군은 현종 경신대기근 시기 청나라에 가서 강희제에게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왔다. 군약신강이란 표현이 나온 바로 그 사행이다. 이 사행은 서인인 현종비 명성왕후와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우명, 김좌명 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북벌론을 강경하게 주장했던 윤휴 등은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를 틈타 요동을 정벌.. 2020. 7. 7.
독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 안용복 > 안용복은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다. 동래에 주둔 중인 조선 수군(경상좌수영) 부대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 병사로 근무하여 당시 부산에 주재 중인 왜관(倭館)을 자주 왕래하고 일본인과 대화를 했던 영향 때문에 일본어에도 능통한 편으로 일본어 통역도 맡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에는 평범한 어획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울릉도에 몰래 불법으로 입항한 일본 어선이 정박한 것을 본 후에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일어났.. 2020. 7. 6.
숙종이 사랑한 여인 < 희빈 장씨 > 희빈 장씨는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숙종의 후궁이었으며, 한 .. 2020. 7. 3.
숙종의 계비 < 인현왕후 민씨 > 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 기사환국 때 폐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진다.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존호(尊號)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는 의열정목(懿烈貞穆)이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숙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숙종 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인현왕후는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를 앓으면서 20살에 요절.. 2020. 7. 2.
조선 19대 왕 숙종 - 이 순 숙종은 조선 제19대 왕으로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숙종의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며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 때 조선왕조 19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인경왕후 김씨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희빈 장씨에게선 두.. 2020. 7. 1.
숙종실록 은 조선왕조 제 19대 왕 숙종의 재위기간인 1674년 8월에서 1720년 6월인 46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이며, 모두 65권 73책으로 간행되었다.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은 숙종이 세상을 따난 지 반년 뒤인 경종 즉위년인 1720년 11월부터 편찬에 착수하여 영조 4년인 1728년 ㄷ월에 완간하였다. 실록 편찬에 9년이 소용되었는데, 이는 숙종의 재위기간이 47년이나 되어 기사의 분량이 많았고 편찬 도중에 노론.소론의 정쟁으로 신임옥사가 생기는 등 정국이 자주 바뀌고 편찬 책임자가 여러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을 편찬한 전후의 실록청 관원은 아래와 같다. 총재과-김창집, 토대구,최규서, 최석항, 이광좌, 정호, 이관명, 민진원,이의현. 도.. 2020.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