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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시대 인물 - 한석봉 한호는 조선 최고의 명필가이다. ‘석봉’이라는 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가지 서체(글자체)에 두루 능했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로 명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이며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능했다고 한다. 《서경덕신도비》, 《행주승전비》 등 비문이 주로 남아 있다.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한호는 1543년에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과 글씨 쓰기를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 서당을 다니기 힘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 2020. 5. 6.
광해군시대 관련 사건 - 계축옥사 ( 칠서지옥 ) 계축옥사는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다. 계축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축옥사라 하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1608년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소북파를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 및 그 측근에 박해를 가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 2020. 5. 5.
광해군일기 는 조선왕조 제 15대 왕이었던 광해군 1575년에서 1641년의 재위 15년 2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15년간 왕으로 재위하였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는 모두 187개월간에 걸친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서에 의하여 편년체로 서술되었다. 각 달마다 한권씩으로 편철하여 재위기간 187개월 분이 총 187권으로 구성되었다. 는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의 편찬에 참여한 전후 찬수청 관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좌의정 윤방, 도청당상-이정귀, 김유, 도청낭청-이식.이명한.이경여.유백중.김시야.정백창.정홍명.김세렴.김육, 일반.. 2020. 5. 4.
선조의 장자 임해군 임해군은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이자 맏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진(李珒), 자(字)는 진국(鎭國). 어머니는 사도시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딸이다.성품이 사나워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순화군(順化君)과 동북지방으로 피난 가서 가토[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이 모해하여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ㆍ김제남(金悌男 : 인목대비의 아버지)과 함께 역모죄(逆謀罪)로 몰려 살해되었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비참한.. 2020. 5. 3.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조선 선조 때인 1593년에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행주 산성에서 힘을 합쳐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진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 2020. 4. 29.
권율장군,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승리 권율은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장수이다.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2020. 4. 28.
류성룡 <징비록>쓰다 조선 시대의 문신. 25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우의정 자리에 오른다. 임진왜란1)이 일어났을 때 총책임관을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 을 썼다.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의 사촌마을 외가에서 태어났고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의 하회마을에서 성장했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그가 .. 2020. 4. 27.
선조실록 은 선조 재위기간인 1567년 7월에서 1608년 1월인 41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이며, 모두 221권 116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선조의 묘호는 처음에 선종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의 판심에는 이라 인각되어 있다. 광해군 8년인 1616년 8월에 묘호를 선조로 고치면ㄴ서 실록의 표제도 이라 하였다. 은 광해군 원년 1609년 7월 1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8년 1616년 11월에 완성하였다. 은 그 대부분이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 뒤 16년간의 기사로 되어 있으며, 전체 221권 중 195권에 달한다. 반면 선조 즉위년인 1567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25년간의 가사는 모두 26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와 등의 공공 기록과.. 2020. 4. 24.
윤원형의 첩 - 정난정 정난정은 ?∼1565(명종 20). 조선 중기의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의 첩이다. 을사사화에 관여하였으며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받았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사림의 탄핵을 받아 자결하였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明宗)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小尹)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 2020.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