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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시대 백마산성 임경업 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청북방어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고 명, 청군에도 명성이 높았다. 명나라에 망명하여 청나라와 싸우다 생포되었으며,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되어 형틀에서 장살되었다. 임경업은 1594년 충주(忠州) 달천(達川)에 출생하였고 부친은 임황(林篁)이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자 영백(英伯). 호 고송(孤松). 시호 충민(忠愍)이다.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면서(1616년) 왕조 교체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임경업이 급제한.. 2020. 5. 31.
속리산 법주사 - 금강 미륵대불이 있는 곳 속리산 법주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건 겨울이었다. 가족들과 가벼운 겨울산행을 하기로 하고 간 곳이 속리산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지나면 잘 다져놓은 평탄한 흙길을 만날 수 있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깊지 않은 산속에서 법주사를 만날 수 있다. 산행을 하는 길도 일주문을 지나 법주사의 옆길부터 시작하는 코스를 정할 수 있다. 법주사는 산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만난 곳이였다. 그 전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적없던 조금은 생소한 절이였던 것 같다. 그 겨울 눈이 소복히도 내려 아이들과 오르기엔 위험할 것 같아 목표지 삼았던 문장대도 오르지 못 하고 하산을 하는데 아쉬움 마음에 법주사로 들어갔다. 깊지않은 산속 화려해 보이지 않던 절은 문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 2020. 5. 30.
인조시대 인물 - 남한산성 최명길 최명길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부친은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 모친은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으며, 신흠(申欽)의 문인이기도 하다. 최명길은 1586년(선조 19) 금천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晏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孔子)가 되리라."라고 맹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 2020. 5. 29.
강화도 보문사 - 관음성지 강화도에는 유명한 사찰이 두 곳 있다. 하나는 전등사 그리고 하나는 보문사다. 보문사는 강화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최근에는 다리가 연결돼 한결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 사찰 이야기를 올리면서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결정하게 된 보문사는 나에게는 많은 의미를 가지는 곳이기도 하다. 23년 전 신랑과 처음으로 드라이브를 갔던 곳이 보문사다. 나는 강화도를 처음 가는 것이기도 하고 보문사 또한 생소한 곳이었지만 신랑이 어릴 적 엄마의 손을 잡고 자주 왔던 곳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강화도는 아주 깡촌이었으며 보문사로 가는 길은 배에 버스에 아주 고된 길이였다고 한다. 또한 보문사는 결혼을 하고 큰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가출도 하고 방황도 하던 시기에 나와 신랑.. 2020. 5. 28.
영주 부석사 필자가 사찰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영주 부석사다. 2010년도 당시 라는 책이 베스트였고 서점에 들렀다 무심코 집어든 책을 심심삼아 읽었다. 그리고 읽는 내내 그려지는 부석사의 모습과 이야기들은 한편의 멋진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됐다. 그때였던 같다. "아~~ 나는 영주 부석사를 꼭 가봐야겠구나" 교회는 가지도 않고 있던 기독교신자인 나는 산을 걷다 만나게 되는 절의 고요함과 관대함 그리고 평안함 이런 매력에 빠져 있었다. 누구든 언제든 와서 기도할 수 있게 받아주는 절의 관대함과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다스려지는 듯한 고요함이 지쳐가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아 여행을 하는 곳곳의 절은 빠지지 않고 다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설렘이 가시기도 전에 신랑의 출.. 2020. 5. 27.
병자호란 - 광교산 전투를 말하다 - 광교산 전투는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29일 부터 1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의 광교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는 관서(關西) 지방의 요충지인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ㆍ안주성(安州城)ㆍ황주 정방산성(正方山城) 등에 집결해 있는 조선군을 우회하여 한양을 향해 빠르게 남하했다. 1637년 1월 8일 무렵에는 마부타[馬福塔]가 이끈 청나라의 돌격대가 이미 개성 부근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 본대도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에 이르러 있었다. 청나라 군대의 빠른 남하에 놀란 인조(仁祖)는 1월 9일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 2020. 5. 26.
인조시대 관련 인물 - 대동법 시행한 김육 김육은 조선 중기 형조참의, 병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실학자이다. 17세기 후반의 공납제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한양(옛 서울) 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혹은 회정당(晦靜堂)이다. 김육은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우는 비상한 자질를 타고난 아이였다. 1588년 조부인 김비(金棐)가 강동 고을 수령이 되자 부친.. 2020. 5. 25.
인조의 며느리,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 민회빈 강씨는 본관 금천(衿川).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1627년,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는 강석기의 딸을 최종 세자빈으로 간택하여 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사실 강씨는 본래 세자빈이 되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그녀가 간택되기 2년 전, 소현세자는 파평 윤씨 가문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규수는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결국 파혼당해 내쳐지게 되었다. 이후 소현세자의 혼례가 무산된 지 2년 만에 다시 간택을 거쳐 뽑힌 여인이 강빈이다. 이후 병자호란의 패배와 정축하.. 2020. 5. 24.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병자호란의 배경은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2020.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