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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영주 부석사

by 무님 2020.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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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찰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영주 부석사다. 2010년도 당시 <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라는 책이 베스트였고 서점에 들렀다 무심코 집어든 책을 심심삼아 읽었다. 그리고 읽는 내내 그려지는 부석사의 모습과 이야기들은 한편의 멋진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됐다. 그때였던 같다.

"아~~ 나는 영주 부석사를 꼭 가봐야겠구나" 

교회는 가지도 않고 있던 기독교신자인 나는 산을 걷다 만나게 되는 절의 고요함과 관대함 그리고 평안함 이런 매력에 빠져 있었다. 누구든 언제든 와서 기도할 수 있게 받아주는 절의 관대함과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다스려지는 듯한 고요함이 지쳐가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아 여행을 하는 곳곳의 절은 빠지지 않고 다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설렘이 가시기도 전에 신랑의 출장이 영주로 잡혔다는 말에 얼마나 좋았던지 '정말 부석사를 가보는 구나'하며 책부터 찾아 다시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교학()을 펼친 최초의 가람이라 한다. 부석사를 고려시대에는 선달사라고도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이라고 한다. 부석이란 거대한 자연 반석을 말한다. 부석사의 창건신화에는 부석과 선묘라는 중국의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 의상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등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의상은 한 신도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의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하게 된다. 하지만 의상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선묘는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의상이 종남산의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그 신도 집에 들러 사의를 표했다. 이때 선묘는 밖에 있다가 의상을 선창가에서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의상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옷과 물건들을 들고 나왔으나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났다. 그러나 선묘는 옷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내 몸이 용이 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케 해달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무사히 귀국한 후 의상은 산천을 섭력하며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니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았다. 그 곳이 영주 부석사의 자리이다. 그러나 다른 종파의 무리 500명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던 선묘는 의사으이 뜻을 알아채고 허공중에 사방 1리나 되는 큰 바위가 되어 사교 무리들의 가람 위에떨어질까 말까 하는 모양으로 떠 있었다. 사교의 무리들은 이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의상은 이곳에 절을 지어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

이 전설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석사 무량수전 뒤쪽에는 선묘각이라는 산신각이 있음을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부석사는 사과밭 길을 지나면 만나게 된다. 산길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절과 달리 부석사는 직선으로 뻗은 은행나무 길을 지나 높지도 낮지도 않은 비탈길을 오르면 천왕문을 볼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을 만날 수 있다. 이 계단의 끝에서 무량수전을 만날 수 있다.

 

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부석사에는 9세기 때 쌓았다고 여겨지는 대석단과 함께 아름다운 석물들이 많다.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균형미에 장식미를 더한,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아름다운 석등이다. 절 초입의 늘씬한 당간지주도 석등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무량수전 마당 동쪽에는 균형미를 갖춘 삼층석탑이 있으며 경내에는 1967년에 인근 동쪽 골짜기의 옛절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 한 쌍과 비로자나불, 아미타불도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무량수전에 모신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며, 조사당에 있던 14세기의 고려시대 벽화는 지금 유물전시각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대장경 각판도 귀중한 유물이다.
부석사의 건물 가운데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고려시대의 건축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사에서 거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고식()을 보여준다.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와 한 단 아래의 범종각은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그 터에 알맞은 규모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석사의 참맛은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걸어올라가면서 절집이 들어앉은 모습을 하나하나 음미할 때 점점 깊어진다. 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해가는 절의 배치는 절대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만큼 올라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내는 기쁨이 남다르다. 부석사의 공간을 크게 나누어보면 아래로부터 일주문 공간, 천왕문 공간, 안양루 공간, 무량수전 공간이 차례로 이어지고, 무량수전 뒤쪽으로 조사당과 자인당 공간이 있다.

길의 왼쪽에 삐죽이 솟은 당간지주가 보이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그곳에서 멀리 몇 계단 위로 보이는 문이 천왕문이다. 문을 나서면 너른 축대가 양옆으로 펼쳐진 대석단이 있는데, 마주하는 이의 기를 압도한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단아한 삼층석탑 한 쌍이 여름이면 탐스러운 불두화가 피어 길게 이어지는 길 양쪽에 서 있다. 석가탑을 본받았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점으로 미루어 볼 때 9세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부석사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고 인근 동쪽 골짜기 옛 절터에서 1958년에 옮겨온 것이다. 계속 나아가면 범종루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누각 밑으로 빠져나오면서 오른편으로 안양루를 바라보게 되지만, 그보다 먼저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곳에 낮은 돌기둥 두 쌍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괘불지주로, 큰 행사가 있을 때 내거는 괘불을 붙들어 맬 장대를 양쪽에서 버텨주는 기둥보조돌이다. 그 서쪽에 있는 단정한 집이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암인데 본래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
정면을 바라보면 다시 엄청난 대석단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대석단 위에 있는 안양루의 ‘’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이 되는 셈인데, 극락에 다다르는 길은 이리도 멀고 숨가쁘다. 다시 계단을 두 단 오르면 이제 안양루 밑으로 해서 무량수전에 이르게 된다. 이 안양루 축은 이제까지의 남서향이었던 축과는 살짝 비껴서 정남을 향하고 있다. 이런 방향 전환으로 숨을 틔워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수직의 권위는 한껏 살리고 있다. 누각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자태가 매우 단정한 석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무량수전 앞에는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무량수전 왼쪽 뒤로 큰 바윗돌이 비스듬히 얹혀 있는 부석이 있고, 오른쪽 뒤편으로는 1칸짜리 작은 집이 있는데 의상대사와 인연이 있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다.
부석을 돌아 아래쪽으로는 삼성각이 있고 그 옆의 요사채는 주지스님의 거처로 쓰이는 삼보전이다. 댓가지를 엮은 바자울이 속인의 호기심 어린 발길을 살짝 멈추게 한다. 그 앞으로 해서 내려가는 길은 석축을 옆으로 돌아 바라보는 맛도 좋거니와 기왓장으로 단을 이룬 층계를 밟아 내려오는 느낌도 좋다. 같은 부석사 안이지만 한 굽이를 돌기만 해도 이리도 다른 공간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오른쪽 둔덕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옆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갈래길이 나온다. 여기서 동쪽인 오른쪽 길로 가면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이 나오며, 서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이 나오는데, 이 두 전각은 세운 지 몇십 년이 되지 않은 건물로, 조사당을 본떠 지은 맞배지붕집들이다.

 

무량수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한참을 바라만 봤다. 책에서 설명한 배흘림기둥의 멋을 쉽게 느낄 수는 없었다. 배가 뚱뚱한 커다란 기둥은 내가 늘 보던 일짜로 잘 빠진 기둥과는 다른 생소한 모습이었던것이다. 하지만 색을 입지 않은 오래된 기둥과 색 바란 기와지붕과 크지 않은 소박한 절의 모습은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량수전은 안양루 밑을 지나며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마치 네모진 액자틀 사이에 찍힌 ‘예술사진’을 보는 듯 그 자체로 완벽한 구도 안에 석등의 화사석 모습이 화사하게 보인다. 화사석 너머 빠끔히 보이는 ‘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서방 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이라 하여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니 ‘무량수전’이 되는 것이다.

무게가 적당히 무거워 보이는 팔작지붕, 앞에서 보아 세 칸으로 단정한 격자문이 달린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다.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같은 것들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새에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는 수법들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보이게 한 것을 말하고, 귀솟음은 건물 모서리기둥을 중앙보다 좀더 높인 것을 말한다. 이는 모두 사람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려는 보정작용들이다.9) 안허리곡은 가운데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게 하여, 위나 옆에서 무량수전을 보았을 때 처마 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으로 가는 동쪽 언덕진 곳에 육중한 삼층석탑 한 기가 있다. 본래 탑을 모시지 않은 의상의 뜻으로 보면 부석사 초창 때에는 없었으며 9세기에 중창되면서 자리하게 된 듯도 하나 분명치는 않다. 탑 앞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있어 서로 한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층석탑 옆으로 나 있는 길은, 대명천지에 모든 것을 다 드러내듯이 온몸을 펼쳐보이던 부석사와는 달리, 갑자기 오롯해지는 숲길이다. 나무 사이사이 나 있는 산죽이 겨울이면 흰눈을 머금어 눈꽃을 피우기도 하는 정취 있는 이 길은, 바닥에 잔잔히 돌이 깔려 있어 예삿길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몇 계단 오르면 단정한 옆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조사당()이 보인다.

내부에는 의상대사상을 모시고 일대기를 그린 탱화를 걸었는데 다 20세기 들어서 조성된 것들이다. 바닥에는 고려 때처럼 전돌이 깔려 있다. 벽에는 본디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그려져 있었으니, 천계를 수호하는 이 천왕들을 조사당 벽에 그렸던 것은 그만큼 의상을 모시는 지성이 극진했다는 뜻이겠다.

 

그 외에도 선묘각과 석등, 아미타여래죄상등 볼것이 많다. 오래된 사찰이다 여러 유물과 곳곳의 자리에는 그 만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 부석사에서 만난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무량수전에서 서서 바라본 모습을 꼽을 것이다. 천왕문에서부터 돌계단을 올라 무량수전에 오르기 까지 아름답고 신기하다 느꼈던 모든 감동이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지나온 건물들의 층층히 앉은 기와지붕과 그 너머로 보이는 겹겹이 둘러진 태백산백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 잊혀졌다.

이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 주고 싶지만 그것은 봐야만 알수 있을 것 같다.

단, 걸어 올라가는 길에 뒤돌아 보지말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한번에 이 풍경을 바라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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