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39 광해군 시대 조선의 의학자 < 허준 >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이다.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를 지냈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허준(許浚, 1539-1615)은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한 ‘의성(醫聖)’이 되고,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의 일생을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허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소설과 드라마의 상상력일 뿐이다이라고 한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낸 허곤(許琨)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 2020. 5. 14.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오성의 원래 이름은 이항복, 한음의 이름은 이덕형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에 어려서부터 친구로 자란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두 사람 다 율곡(栗谷)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참여한 사실, 임진왜란 때에 정치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을 세운 점,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열어 그 유지에 함께 기여하였고, 임해군(臨海君)이 관련된 사건의 처리 및 인목 대비 폐모론과 영.. 2020. 5. 13. 백사 이항복 '오성과 한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조선시대에서도 특히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오성과 한음’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부연이 필요 없겠지만 ‘오성(鰲城)’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고 ‘한음(漢陰)’은 한원부원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다. 서로 다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뛰어난 인물이 특히 많이 배출되었던 16세기에도 우뚝한 존재였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고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ㆍ동강(東岡)이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우참찬(정2품)까지 오른 이몽량(李夢亮)이고 어머니는 현감 최윤(崔崙, 본관은 전주)의 딸이다. 이항복은 1556.. 2020. 5. 13. 광해군시대 인물 - 김개시 (광해군 왕의 여인, 조선3대 악녀) 김개시는 조선 광해군 때의 상궁이다. 미모는 아니나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그 해독이 컸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제거에 앞장서는 등 광해군의 왕권강화를 위해 온갖 악역을 도맡아했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궁녀였다. 개시의 시(屎)가 ‘똥 시’ 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름은 김개똥이었을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지만,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또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 등에는 그녀의 이름이 각각 ‘개희(介姬)’, ‘가히(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녀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2020. 5. 12. 오리 이원익, 대동법을 완성하다 이원익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를 규정하는 대표적 특징을 알려준다. 그는 87세로 매우 장수했고, 그런 까닭에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과 인조 반정(76세, 영의정), 정묘호란(80세, 영중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통과했다. 나이와 관직이 보여주듯이 그는 그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지위와 임무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의 일상은 평온보다는 변화와 격동에 지배되기 쉽다.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기도 하고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중기는 뛰어난 인물들이 특히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조건은 특히 가혹했다.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그런 국면을 헤쳐간 .. 2020. 5. 11. 광해군의 중립외교 - 강홍립장군 (사흐루전투) 강홍립은 1560(명종 15)∼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후금을 쳤으나 대패하였다. 후금에 억류되었다 정묘호란 때 입국하여 조선과 후금의 강화를 주선하였으나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1560년 병조참판 강신(姜紳)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강온(姜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 아버지는 참판 강신(姜紳), 어머니는 정유의(鄭惟義)의 딸이다.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 강사상(姜士尙)의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고, 아버지 강신은 정여립의 역모를 평정하여 평난공신에 책록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 2020. 5. 10. 광해군 - 인목대비 폐하다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왕비. 계비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 생모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폐위되는 불운에 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인조반정으로 명예를 회복한 대비는 바로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를 지칭하는 말이다.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에게 시집을 와서 선조가 그토록 바랐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영창대군은 그녀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태어나 1602년(선조 35) 선조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당시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 선조의 나이는 51세로, 당시까지는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과 계비였다. 선조는 의인왕후 사.. 2020. 5. 9. 광해군, 대동법 시행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이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공물의 이런 폐단을 이용한 관리나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배씩 가중하여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防納:代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더구나 거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을 배정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의 모리 행위는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지만 오히려 국가 수입은 감소되었다. 결국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조세제도는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이었다. 17세기 초.. 2020. 5. 8. 광해군시대 사건 - 회퇴변척 회퇴변척은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배척한 일이다.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 2020. 5. 7. 이전 1 ··· 50 51 52 53 54 55 56 ··· 7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