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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이순신장군 임진왜란 그리고 백의종군 조선 14대 왕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의 상소를 무시하고 김성일의 상소를 채택한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의사가 없다고 판단을 한다. 이 판단의 근거는 누구도 전쟁준비를 시작해서 생길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 피하려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쟁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 2020. 3. 23.
예종실록 은 조선왕조 제8대 왕 예종의 재위기간은 1468년 9월에서 1469년 11월 약 1년 3개월간의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이며, 모두 8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 151호로 지정 되었다. 의 말미에는 "성화 6년 경인 2년에 명령을 받아 사초를ㄹ 출고하여 7년 12월에 이르러 의 편찬을 끝내고, 편찬하기 시작하여 8년 임진 5월에 끝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 예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성화 6년, 즉 성종 원년인 1470년 2월에 춘추관에서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아 성종 2년인 1471년 12월 의 편찬을 마친 뒤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3년인 1472년 5월에 완성하였다. 시호는 양도, 존호는 흠무성무의인소효, 묘호는 예종이며, 능호는 창.. 2020. 3. 22.
이순신 32세 무관에 합격, 47세 전라도좌도 수군군절도사가 되다. 이순신장군하면 여러가지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리고 전장에서 승리를 이끌며 죽어간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이라 불리는 한 남자를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린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 2020. 3. 22.
선조 , 사림의 시대와 동인의 김효원 선조의 즉위 후 사림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사림은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며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동인과 서인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으로 인해 붕당의 시작이 도래하게 된다. 이때 동인의 우두머리가 김효원이라 할 수 있다. 동인이라 함은 사는 지역이 동쪽이여서 동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김효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조부는 전생서직장(典牲署 直長) 김덕유(金德裕), 부친은 영유현령(永柔縣令) 김홍우(金弘遇)이다. 모친은 윤은좌(尹殷佐)의 딸이다. 조식(曺植) ·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신진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명이 높았고, 김안경(金安慶) · 최인기(崔仁起) · 정유성(鄭惟誠) · 김안복(金安福) 등.. 2020. 3. 22.
선조시대 사림의 시대와 서인의 심의겸 선조의 재위 시기에는 참 많은 사건이 있다. 그중에서도 정칮거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발생하이, 이는 바로 사림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붕당의 발생이였다. 제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사림들이 다시 중앙으로 재기하는 데 성고한다. 그리고 이황, 조식, 성혼, 이이를 중심으로 학파가 결성되어 학문이 더욱더 바렂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논쟁은 심화된다. 그리고 얼마후 사림 세력은 둘로 나뉘게 된다. 서로 학문적, 정치거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사림파들은 맨 처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이때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이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1535(중종 30)∼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 2020. 3. 22.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비겁함과 친명정책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전 국토는 황폐해졌다. 전쟁 이후 나라를 지킨 자와 자신을 지킨 자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나라를 지키 이들을 외면했다. 당신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에 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에 대한 홀대가 심했다. 결국 전쟁 이후에 의병은 오히려 몸을 숨겨야 했다. 또한 전쟁 당시 앞장서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를 따라 피난 갔던 호송공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렸다. '아버지 명나라가 있기 때문에,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조선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거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을 강조한게 된다. " 이제 통보하기를 우리나라가 중국이 아니었다면 이들 적을 끝내 죽여.. 2020. 3. 21.
임진왜란의 종결과 조선의 상황 임진왜란은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 2020. 3. 21.
조선 14대 왕 선조 - 정유재란 조선 14대 왕 선조 시대에는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왜의 침입인 임진왜란은 내외적으로 혼란하고 전쟁에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치열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잠시 휴정에 들어가지만 일본 다시 침략해 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년에 일어난 왜의 침입일하여 정유재란이라 한다.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 2020. 3. 21.
임진왜란의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 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2020.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