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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태조, 하륜를 만나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조선 초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하였다. 이첨과 함께《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하공진(河珙辰)의 후예로, 하식(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 하시원(河恃源)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하윤린(河允潾)이다. 어머니는 증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1360년(공민왕 9)에 국자감시(國子監試), 1365년에는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제자로, 1367년에 춘추관검열·공봉(供奉)을 거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고공좌랑(考功佐郎).. 2020. 3. 25.
태조의 책사, 정몽주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이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 2020. 3. 25.
태조의 라이벌, 최영 장군 최영은고려의 명장, 충신이다.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을 명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본관 동주(東州). 시호 무민(武愍).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를 토벌,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 때 원(元)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장사성(張士誠)의 .. 2020. 3. 25.
광해군, 개혁과 중립외교를 펼치다 임진왜란이 한참 일어나고 있는 시기 14대 임금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 2020. 3. 24.
조선 15대 왕 광해군 - 이혼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했다.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으로 15년 1개월이다. 조선의 제 14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조는 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고, 후궁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을 두었다. 그런데 임해군은 성품이 포악해 광해군이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야 세자초 책봉된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저재으이 총사령관 역활을 충실히 하며 백성들을 위로한다. 전쟁 이후, 아버지 선조와 새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위 세습의 위협을 받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선조가 승하하면서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기전 세자 .. 2020. 3. 24.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 의병 > 의병이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일어나 싸운 의로운 병사들을 뜻한다. 양반과 상민, 천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참여했으며, 특히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기에 크게 활약했다. 1592년 4월 13일에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은 불과 수십 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곧이어 평양까지 쳐들어가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외적이 우리 땅을 차지하고 우리 민족을 죽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특히 지방에서 어른 역할을 하던 양반 유학자들이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 의병은 처음에는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 마을을 이루고 있던 양반과 농민, 노비들이 모여 군대를 만든 것이다. 이 의병들을 이끄는 대장은 대부분 그 마을에서 이름이 높았던 양반들이 맡았다. 그러다가 여.. 2020. 3. 23.
유성룡 <징비록>>을 쓰다 유성룡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우의정 자리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총책임관을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 을 썼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 2020. 3. 23.
이순신장군 명량대첩, 노량해전 그리고 생을 마치다.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는 동안에도 전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희망은 이순신장군뿐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 2020. 3. 23.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그리고 <난중일기> 임진왜란이 일어나 있는 상황에서도 붕당으로인한 조정은 혼란하기만 했다.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 2020.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