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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임진왜란의 발발 조선은 일본의 태도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1590년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한다. 그리고 이들은 1년 뒤인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 선종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 일을 보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성일과 황윤길인 상반된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어썽헤 생겼던가?" 하니, 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이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의 앞날의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은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누구도 전쟁에 대한 중압감과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또한 민심이 나빠질가 걱정.. 2020. 3. 21.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 2020. 3. 21.
정여립 모반사건과 동인의 분열 선조가 즉위하고 훈구세력이 약해지며 사림의 시대과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시작된다. 그런데 동인은 한번 더 갈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한번 더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의 바로 1589년에 이러난 이다.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東萊)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僉正,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大同契)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鎭安) 죽도(竹島)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의 지역적 기반은 전라도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 2020. 3. 20.
선조, 사림의 시대와 붕당 발생 선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서 4번째로 즉위기간이 긴 왕이였다. 영조의 재위기간은 51년 7개월 ( 1724 ~ 1776 ) 숙종의 재위기간은 45년 10개월 (1674 ~ 1720 ) 고종의 재위기간은 43년 6개월 ( 1863 ~ 1907 ) 선조의 재위기간은 40년 7개월 ( 1567 ~ 1608 ) 선조 시기에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가 시작 된 것과 붕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림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등용된 원리원칙주의자 성리학자들이다. 제 9대 왕인 성종 대부터 중앙에 등용되었지만, 제 10대 연산군부터 제 13대 명종 대까지 총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림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제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 2020. 3. 19.
조선 14대 왕 선조 - 이균, 이연... 방계출신이 왕이되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1552년에 태어나 1608년에 사망했다. 그의 재위기간은 40년 7개월이다. 선조는 조선 11대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인종, 명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명종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이 되었는니, 조선 최초로 방계 출신의 임금이기도 하다. 본래 이름은 '균'이었으나. 당시 중국 명나라 황제의 이름이 '주익균'이었기 때문에, '연'으로 개명한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에 조선 왕조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선조의 시호는 소경(昭敬)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의 셋째 아들이니 즉 중종의 손자(셋째 아들 계)이다(중종의 첫째 아들은 12대 인종, 둘째 아들은 13대 명종). 어머니는 영의정.. 2020. 3. 19.
명종,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다 명종이 재위하던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이다. 밖으로 왜의 침입이 있었은데 이를 을묘왜변이라 한다. 안으로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다. 임꺽정의 난은 16세기중반 황해도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무장대의 활동으로 조선에서 일어난 반란중에서도 꽤 장기적으로 지속된 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활동기록이 보이는 것은 1559년(명종 14)부터이다. 본래 황해도는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이어서 그 비용을 대느라 다른 도에 비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 임꺽정이 활약한 봉산·재령에서는 바닷가에 있는 갈대밭마저 권세가들이 차지하여, 갈대로 삿갓과 삿자리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는 백성들은 갈대를 사 써야 했다. 당시 임꺽정은 갈대를 엮어서 생활도구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 2020. 3. 19.
명종, 을묘왜변이 일어나다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명종의 재위기간 22년은 나라 아팎으로 혼란이 컸다. 안으로는 왕실 외척의 폭정이 심했고, 탐과오리들이 득세했으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각종 비리가 난무했다. 게다가 밖으로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때 일어난 것이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이란 조선 명종 때 왜구가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을묘왜변의 배경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과 일본 국내 사정의 혼란에서 일어났다.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중종 39) 왜인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 2020. 3. 18.
명종, 대윤과 소윤의 싸움, 을사사화 조선의 12대 왕 인종이 9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승하하고 13대 왕으로 명종이 즉위를 하게 되면서 권력다툼의 끝을 보여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을사사화라 할 수 있다.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丁未)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친정인 대윤(大尹)파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小尹)파로 갈라져 외척간.. 2020. 3. 18.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임금 위의 여왕 본관은 파평(坡平), 성은 윤(尹),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왕,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였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신씨였는데 연산군 때의 권신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신하들이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된 왕은 자신의 아내를 지킬 힘이 없었고 결국 중종은 신씨가 폐서인이 .. 2020.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