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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연산군, 어머니를 위한 복수를... 갑자사화 연산은 즉위 초기에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쇠망치를 들지 않았다. 연산군은 냉철한 왕이였다. 대신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마다 이를 핑계 삼아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하고 방관한 신하들을 처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1504년 갑자년이었다. 이때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이 불게 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은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 2020. 3. 10.
연산군의 장녹수에 대한 사랑 가난해서 시집도 여러 번 가고 자식까지 둔 여인이 왕에게 발탁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바로 장녹수(張綠水, ?~1506) 이야기이다. ‘연산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장녹수는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출신에서 일약 후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30세의 나이에도 16살 꽃 다운 여인으로 보였다는 동안(童顔) 장녹수는 자식을 둔 후에도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의 길로 나섰고,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탕한 삶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다. 그녀는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발판 삼아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모든 상과 벌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2020. 3. 9.
폭군 연사군의 첫 번째 피바람 '무오사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을 닮고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고, 신하들의 목소리에 경청하였다. 그렇다 보니 성종과 대신, 대간들 간의 적절한 균형 속에 정치가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왕권이 약화될 소지가 있었다. 특히 바른 소리를 하는 대간의 행동이 왕권강화를 원하는 연산군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 무오사화 '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총 4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화란 조선의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 때에는 총 2차례가 일어나게 된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사초가 계기가 되어 일어나게 된다. 사로란 을 만들기 위한 역사기록이다. 사초 중에서도 사림의 대표 주자였던 김종직이 쓴 이 계기가 되.. 2020. 3. 9.
조선 10대 왕 연산군 - 이융 1476년(성종 7)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成宗)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妃)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연산군 나이 3세에 어머니 윤씨가 폐서인이되고 6세에 사약을 먹고 죽는다. 성종 14년인 1483년 연산군 나이 7세에 세자에 책봉이 된다. 12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은 후, 19세에 즉위하게 된다 연산군은 역사상 손꼽히는 악덕과 살육을 저른 왕으로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실록을 통해 연산의 세자 시절을 살펴보면 딱히 뛰어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 2020. 3. 9.
사림 그리고 김종직의 '조의제문 성종 하면 단연 사림(士林)을 어엿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시킨 인물이고, 김종직을 비롯한 이들을 중용했으며, 대간(臺諫) 세력을 크게 키워 조선식 비판 정치를 활성화시킨 인물로 유명하지만, 정작 자신이 키운 대간 권력에 의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으로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다. 조선 초만 해도 대간은 미래의 대신들이고, 대신들은 과거의 대간들로, 이해 관계가 상당 부분 일치해 정계와 언론계가 유착해서 초장부터 싹이 노랬는데, 세조 때는 정청(政廳)에서 관이 벗겨지고 상투를 잡혀 끌려 나가는 등 대우가 매우 처참해서, 거의 구실을 못 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성종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대간을 채웠고, 유명무실해진 사헌부, 사간원의 권력을 회복시키며, 새로이 홍문관에게도 비판 기능을 부여하여 비판을 활성화시켰다... 2020. 3. 6.
단종실록 은 조선왕조 제6대 왕 단종의 재위기간 1452년 5월 ~1455년 윤 6월의 3년 2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원래 이름은 였으나, 숙종 때 그를 단종으로 추존한 뒤에는 ,단종대왕실록>이라 하였다. 세조 때에 편찬된 원편 는 문종이 세상을 떠난 1452년 5월 14일부터 단종이 양위하기 전날인 1455년 윤 6월 10일까지의 수록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백 4년 만인 숙종 24인 1698년 무인 11월 8일에 영의정 유상운 등의 주처으로 노산군에게 '순정안장경순돈효'라는 시호와 '단종'이라는 묘호, '장릉'이라는 능호를 올리고, 종묘에서 복위 고유제를 올림으로써 왕위를 복구하게 되었다. 의 편찬자들도 를 편찬한 신숙주, 한명회, 최항, 노사신 등 정난공신들이 주축되었을 것이다. 단.. 2020. 3. 5.
문종실록 은 문종 즉위년 1450년 2월 22일부터 문종 2년인 1452년 5월 13일까지 약 2년 4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텨체로 수록한 사서이다. 정신 이름은 이며, 모두 ㅂ3권6책이었으나 1권은 결본이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은 단종 원년인 1453년 정월 6일에 황보인 등이 편찬을 청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곧 춘추관에 명하여 문종 대의 공사 기록과 사초를 수납케 하고 편찬을 시작하여 세조 원년 1455년 11월에 편찬을 마쳤다. 다음달 12월 19일에 을 실록각에 봉인하고 수찬관들을 의정부에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은 편찬한 뒤 실록각에 봉이되어 오다가 성종 4년인 1473년 6월 8일 , , 과 함께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의 사대 사고.. 2020. 3. 5.
세종실록 은 조선왕조 제4대 왕 세종의 재위기간인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7개우러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이며, 모두 163권 15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ㅣ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1개월 뒤인 문종 2년인 1452년 3월 2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단종2년인 1454년 3월에 완성되었는데, 2년 1개월이 걸렸다. 당시 편찬의 총재관은 처음에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였으나,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자, 최후의 감수는 정인지 혼자 담당하였다. 은 그 분량이 방대하므로 처음에는 한 벌만 등초하여 춘추관에 보관하였다. 세조 12년인 1466년에 양성지.. 2020. 3. 4.
태종실록 은 조선왕조 제3대 왕 태종의 원년인 1400년 11월부터 18년(1418) 8월 10일까지의 텩사를 편년체로 기로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한 이며 모두 36권 1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 8년인 1426년 8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세종 13년인 1431년 3월에 완성하였다. 은 쳔찬 직후 세종 13년인 1431년 4월 25일 .과 함께 고려 시대의 실록을 보관하였던 충주 사고에 봉인하였다. 그때까지 실록은 이 한벌뿐이었고, 충주 사고는 민가가 밀집한 시내에 위치하여 화재가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21년인 1439년 6월 사헌부의 건의로 새로 전주와 성주에 시고를 설치하고, 세종 27년인 1445년 11월 19일까지 세벌을 더 베껴 모두 네벌을 만들어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사고에 가기 한.. 2020.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