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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왕조실록 태조 - 왕건

by 무님 202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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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 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서해 용왕의 딸과 혼인하여 왕건을 낳았기 때문에, 대대로 왕씨 일족의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늘이 돋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당나라의 황제(숙종)가 왕자 시절 한반도를 유람하다가 얻은 사생아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라는 전설도 있으나, 왕가의 핏줄을 미화하기 위해 생겨난 전설로 여겨진다. [고려사]에도 실려 있는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융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짓자 당대 도참()의 제일인자였던 도선()이 지나가다가 “이곳에서 성인이 나시리라”라고 외치고는, 융에게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도선은 왕건이 17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 “너는 장차 왕이 될 운명이다”라고 알리고, 병법과 각종 술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왕건이 태어났을 때의 신라는 이른바 ‘하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841년, 장보고가(, ?~846)의 반란을 일으키고 죽음에 이루게 되면서 해로를 장악해서 세력을 쌓은 여러 호족을 하나로 통합해 해상제국을 세웠던 장보고가 사망하고 나자, 그의 아래에 있던 호족들이 저마다 독자 행동에 나서면서 지방의 이탈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 왕건 궁예을 만나다.

이 가문 중 왕건의 가문도 있었다.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왕건의 가문은 송악 일대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성강 일대에서 강화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튼튼한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이런 강력한 해군력과 재력을 갖춘 왕건 가문과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 ?~918)가 896년에 손을 잡음으로써, 후고구려(고려)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 궁예는 융을 금성 태수로 삼고 송악에 도읍한 다음, 갓 스물이던 왕건에게는 송악산 기슭의 발어참성 성주의 직위를 주었다.

913년(?)에는 덕진포에서 견훤(, 867~936)의 수군과 일대 대결을 펼쳤는데, 왕건은 화공을 써서 후백제 수군을 격파하고, 견훤이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반남현을 공격해 물싸움에 능숙하다고 ‘수달’이라는 별명이 붙은 견훤의 애장, 능창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궁예는 왕건의 활약에 힘입어 견훤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궁예는 본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지은 국명을 904년에 마진()으로, 911년에는 태봉()으로 고쳤으며 수도도 개경(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이는 나라가 넓어지고 왕건 등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궁예가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추진한 변화였다.

 

* 왕건 고려의 주인이 되다.

하지만 궁예가 독재의 길을 치달으니,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왕건은 홍유ㆍ배현경ㆍ신숭겸ㆍ복지겸ㆍ박술희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 이로써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한동안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을 바로잡고, 북방의 위협(당시 발해가 쇠퇴하며 거란이 새로운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에 대비하느라 통일전쟁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927년의 팔공산 전투에서는 왕건이 직접 신라를 도우려 나섰다가 견훤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만 구해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왕건은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했다. 비록 부패와 분열로 힘을 못쓰고 있지만, 그래도 신라에는 많은 인구와 강력한 호족들, 그리고 천년 왕실의 전통과 문화가 있었다.

 928년에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신라를 돕는 명분은 중국 춘추시대에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주나라 왕실을 도운 대의와 같다”고 밝힌 점을 보면 적어도 한동안은 신라의 왕을 주군으로 받들기까지 했던 것 같다.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자, 그 유민들을 받아들여 최고의 대우를 했다. 실로 삼국시대 이래 한민족의 여러 갈래가 고려라는 큰 틀 안으로 융합하게 된 것이다. 그 대업의 종지부는 936년에 왕건과 견훤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신검을 공격, 마침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찍혔다.

 

 

* 태조 왕건의 승하

왕건은 943년 5월에 병에 걸렸고, 67세의 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나는 죽는 일을 집에 돌아가는 일처럼 여기고 있다. 슬퍼할 것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신하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자, 잠시 정신이 든 왕건은 “생명이 덧없음을 모르느냐?”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숨이 끊겼다고 한다.왕건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약 40년 뒤, 최승로(, 927~989)가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올리며 그 서두에 태조부터 경종에 이르는 다섯 임금의 평가를 적었는데, 거기서 왕건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태조 왕건, 그는 모두가 자신만을 내세우는 세상에서 남을 돌아볼 줄 알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 속에서 평화와 타협의 비전을 보았다. 물론 그에게도 결점은 있고, 실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땅에 오고간 수많은 지도자 중, 그를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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