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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11

윤원형의 첩 - 정난정 정난정은 ?∼1565(명종 20). 조선 중기의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의 첩이다. 을사사화에 관여하였으며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받았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사림의 탄핵을 받아 자결하였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明宗)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小尹)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 2020. 4. 23.
명종의 업적 - 구황촬요 구황촬요는 1554년(명종 9)에 간행된 흉년에 대비한 내용의 책이며 1권 1책. 목판본으로 되어 있다. 명종 때에 영호남에 기근이 극심하였다. ≪구황찰요≫는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언해본(한글)으로 진휼청의 인포(印布)로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흉년을 만나면 구호 사업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구호 사업과 함께 생식벽곡(生食辟穀)과 구황요기(救荒療飢)의 방법이 세종 때부터 여러 가지 책자로 간행, 보급되었다. ≪구황벽곡방 救荒辟穀方≫이 세종의 편집으로 간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 내용은 ≪구황촬요≫에 많이 인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구황촬요≫의 초판본은 총 17면이다. 경주에서 목판본으로 발간되었다고 한다. ≪구황촬요≫는 효종 때에 신속(申洬)이 합편으로 간행한 ≪농가집성.. 2020. 4. 21.
백적 임꺽정, 의적이 되다 임꺽정은 조선 중기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천민인 백정 출신이며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되고 당시 척족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이 발호하고, 관리들의 수탈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민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날쌔고 용맹스러웠으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사회를 틈타 처음에는 도당 몇 명을 모아 민가를 횡행하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해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2020. 4. 21.
명종의 업적 - 판옥선 판옥선은 조선시대 명종 때 개발한 것으로 수군이 사용했던 전투선이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 수군의 주된 군함으로 이용되어 해상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배의 바닥이 평평하고 윗부분에 판옥(옥상)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명종(明宗) 때를 전후해서 왜적은 그들의 배를 개량하여 침략해오기 시작했다. 왜선의 규모는 커지고 화포를 강화하여 조선의 맹선으로 이들을 격퇴하기가 어려워졌다. 판옥선은 이러한 왜선을 무찌르기 위해 1555년(명종 10)에 만든 배이다 임진왜란 중 크게 활약하였으며 뒤에 전선(戰船)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전투함으로 일명 판옥전선이라고도 한다. 조선 전기의 군선(軍船)은 문헌상으로 대맹선(大猛船)·중맹선·소맹선 등 세 종류로 나타나고 있으며, 각 진포에 배치되어 있던 척수는 대맹선 81.. 2020. 4. 21.
명종의 업적 - 경국대전주해 조선 명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법률 해석서로, 기존 경국대전의 조문이나 용어는 간결하면서도 뜻이 함축되어 있어서 그 문장과 실정에 능통하지 않고는 법을 제대로 적용받기 힘들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명종에 의해 대전주해관(大典註解官)으로 임명된 안위(安瑋), 민전(閔荃)이 경국대전의 내용을 주해하였고, 판서 정사룡(鄭士龍)과 참판 심통원(沈通源)이 검토, 정정하였다. 이후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좌의정 상진(尙震), 우의정 윤개(尹漑)의 검토를 거쳐 1554년(명종 9)에 완성, 그 이듬해부터 시행하였다. 주해한 항목수는 이전(吏典) 16항, 호전(戶典) 11항, 예전(禮典) 7항, 병전(兵典) 8항, 형전(刑典) 18항, 공전(工典) 2항으로 도합 6.. 2020. 4. 21.
명종, 양재역 벽서 사건 명종 2년(1547)에 일어난 조선시대의 사화(士禍)로.일명 벽서의 옥(壁書獄), 양재역벽서사건이라고도 한다. 을사사화의 뒤치다꺼리 격으로 윤원형이 이끄는 소윤이 대윤 일파의 잔당을 숙청한 사건이다.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 말년부터 경원대군(慶源大君)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일파와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2020. 4. 21.
을묘왜변 그리고 비변사 을묘왜변은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이다. 을묘왜변의 배경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과 일본 국내 사정의 혼란에서 일어났다.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중종 39) 왜인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를 맺고 왜인들의 내왕 통교를 허용하였다. 정미약조는 결과적으로 왜인들의 위반 정도에 따라 통제가 강화된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너그럽게 취급해 주던 조선측의 방침은 강화되었으며, 왜인들의 내왕무역에 대해서도 통제 규정이 강화되어 여러 가지 규제가 .. 2020. 4. 20.
명종, 을사사화가 일어나다 을사사화는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李沆·金克愊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 2020. 4. 20.
명종, 을묘왜변이 일어나다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명종의 재위기간 22년은 나라 아팎으로 혼란이 컸다. 안으로는 왕실 외척의 폭정이 심했고, 탐과오리들이 득세했으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각종 비리가 난무했다. 게다가 밖으로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때 일어난 것이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이란 조선 명종 때 왜구가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을묘왜변의 배경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과 일본 국내 사정의 혼란에서 일어났다.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중종 39) 왜인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 2020.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