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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10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1. 임백령 - 조선 전기 해남 출신의 문신이다. 임백령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인순(仁順)이며 호는 괴마(槐馬)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동복현감을 지낸 임간(林幹), 증조할아버지는 증 이조참의 임득무(林得茂), 할아버지는 진안현감을 지낸 임수(林秀)이다. 아버지는 임우형(林遇亨)이고 어머니는 참봉 박자회(朴子回)의 딸 음성박씨(陰城朴氏)이다. 형은 임천령(林千齡)·임만령(林萬齡)·임억령(林億齡), 동생은 임구령(林九齡)이다. 임백령은 1498년(연산군 4) 해남에서 태어나 박상(朴祥)의 문인이 되었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하여 상서원직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예문관검열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저작으로 전임하였다. 1527년(중.. 2020. 12. 9.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1. 유인숙 - 조선전기 한성부우윤, 공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명(原明), 호는 정수(靜叟). 유의(柳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종식(柳宗植)이다. 아버지는 사간 유문통(柳文通)이며, 어머니는 이추(李抽)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했고, 1510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이조좌랑·직제학 등을 거쳐 1515년 홍문관부수찬·전한이 되었다. 이 때 사림파의 일원인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유배되자, 이들의 치죄를 둘러싸고 찬반의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신씨 복위 문제를 넘어서 신구 세력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했는데, 사림파를 대표해 이들의 치죄를 적극.. 2020. 12. 6.
인종, 명종시대 관련 인물 1. 성수침 - 조선전기 『청송집』, 『방참판유령묘갈』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한성부윤 성득식(成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성충달(成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성세순(成世純)이다. 어머니는 강화부사 김극니(金克怩)의 딸이다. 아우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大學)』과 『논어(論語)』 등 경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541년 유.. 2020. 12. 2.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1. 권벌 - 조선전기 의정부좌참찬, 의정부우찬성, 원상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안동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할아버지는 부호조(副護早)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 윤당(尹塘)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이.. 2020. 11. 5.
중종의 선택과 버림을 받은 조광조 조광조는 조선전기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한성 출생.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 손이며, 조육(趙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충손(趙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의(閔誼)의 딸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 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 2020. 4. 14.
중종, 기묘사화 '선비들의 죽음' 기묘사화는 네 개의 사화 중에서 ‘선비들의 피화’라는 의미에 가장 적합한 사건일 것이다. 그것은 삼사의 영향력이 대단히 팽창했을 때 국왕과 일부 대신이 그 관서를 이끈 주요 인물들을 전격적으로 숙청한 사건이었다.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삼사를 장악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중종의 확고한 신임이었다. 특히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그야말로 물과 고기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각별했다. 등용된 지 2년 반만에 당상관에 오르고(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6월에 벼슬을 시작해 1517년 윤12월 직제학이 되었다), 짧게는 사흘부터 보통.. 2020. 4. 12.
성종시대 성리학자, 사림 김굉필 김굉필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자칭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김굉필이 정계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성종의 사림 등용 정책 때문이었다. 성종은 계유정난 이후 정권을 장악하여 보수반동을 고집하던 훈구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향촌사회에서 유학을 수학하던 사림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1480년 사마시.. 2020. 4. 5.
중종의 남자 조광조 기묘사화로 죽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를 주장하여 사림 28명을 선발했으며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정치를 서둘러 단행하였다. 사흘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로 귀양갔으며 한달만에 사사되었다.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2020. 3. 16.
중종의주요정책과 사건과 중종의 묘 중종의 재위기간은 재위기간은 38년 2개월이 였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훈구세력들이 강압은 거침이 없었다. 중종이 사랑한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를 시킬만큼 반정 신하들의 강압적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되는 해인 1515년(중종 10),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중용하여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일파를 등용한 초기에는 미신 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향촌에 향약(鄕約)의 실시를 권장하였다. 재위 후기에는 군적(軍籍)의 개편과 전라도ㆍ강원도ㆍ평안도에 대한 양전(量田, 토지조사)을 실시하였으며, ▲진(鎭)의 설치 ▲성곽의 보수 ▲평안도 여연ㆍ무창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에.. 2020.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