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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9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 도시 수원 <현릉원 > 1789년 정조 13년 7월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이 양주으 배봉산 기슭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다녀와서 상소을 올렸다. "뱀 등이 묘지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망주석은 쓰러져 있고 봉분에는 억새불이 돋아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박명원 상소문을 읽은 정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왕의 아버지의 묘가 이 지경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그날의 기록 정조는 조정의 대신들을 희정당에 불러 승지로 하여금 박명원의 상소를 대신 읽게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정조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정조는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그 장소는 수원부의 관청 뒤쪽으로 정하고 서유방을 경기관찰사로, 조심태극 수원부사에 임명하여 이장에 대한 일을 맡겼다. 사도세자의 이장은 신속하게 처리.. 2020. 9. 17.
정조의 효심이 담긴 < 화성 행궁 과 융건릉 >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효심이 각별했던 임금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 보여준 지극한 효심은 백성에게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는 비명에 숨져간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겨 묘호를 바로 세우는 등 선친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1년에도 수차례 능 참배길에 나섰고 가식 없는 효심으로 백성을 감복시켰다. 정조는 사후에도 부친의 능이 있는 지금의 화성시 화산 기슭에 묻혔다. 수원시 교외 약 8km쯤에 자리잡은 융건릉(隆健陵 사적206호)은 부친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한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에 들어 있어 모두 서향이다. 융건릉과 함께 들러 보아야 할 곳으로 기복사인 용주사가 있다... 2020. 9. 14.
정조의 업적3 1. 규장각 설치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 갔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일시 설치되었으나 폐지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세조가 친히 쓴 ‘奎章閣(규장각)’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고 역대 국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설립되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정조는 “승정.. 2020. 9. 10.
정조의 최측근이자 최고의 실권자 <홍국영> 홍국영은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48년 홍낙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왕명.. 2020. 9. 6.
정조실록 은 조선왕조 제22대 왕이었던 정조의 재위 기간인 1776년 3월에서 1800년 6월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조의 본디 묘호는 정종이었으므로 그 실록의 본디 이름도 으로 약칭이라 하였다. 광무 3년인 1899년에 묘호를 추종 개정함으로써 그 실록도 으로 부르게 되었다. 본서 54권과 부록 2권을 합쳐 모두 56권 5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익년인 순조 즉위년인 1800년 12월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순조 5년인 1805년 8월에 완성하였다. 정조 대에는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실록 편찬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며 그 편찬 경위도 다른 실록의 편찬 사례와 대체로 같았다. 실록청 총재관에는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서매수 등 4명이 임명되어 편찬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2020. 9. 4.
사도세자의 방탕생활 2. 1752년 영조 28년 3월 영조와 세자 부자 간이 계속 반목하던 중에 세 살 된 세손이 죽었다. 임금은 세자 선은 의중에 두지 않았고 오직 왕세손에게 온갖 기대를 걸었는데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났다. 이 해 9월 세자빈 홍씨가 두 번째 왕손을 낳았으니 뒤에 22대 왕 정조가 되는 세손이었다. 영조와 세작 간에 갈등이 계속되자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환수했다. 세자는 멍에를 벗어 버린 듯 홀가분했고 한편 허전하기도 했다. 그때 만난 여인이 16세의 나인 임씨였다. 세자는 임씨에게 욕망을 불태웠다. 세자로서는 세자빈 외에 처음으로 접촉하는 여인이었다. 승휘 임씨는 그 뒤 숙빈으로 봉함을 받았고 뒤에 두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녀가 낳은 은언군 인과 은신군 진, 두 왕자 중 은언군은 청종의 조부가 되고 .. 2020. 9. 2.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 2020. 8. 25.
태조. 정종 시대 관련 인물3 1. 우현보 - 1333(충숙왕 복위 2)∼1400(정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우길생(禹吉生)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실패해 파직되었다. 그 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 2020. 7. 24.
조선시대 왕들의 정원 < 창덕궁 후원 > 안녕하세요. 창덕궁 후원을 소개합니다. 창덕궁 후원은 왕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비원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후원은 궁궐의 정원이라는 뜻에서 금원(禁苑), 궁궐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원(北苑), 또 뒤쪽에 위치한 정원이라는 뜻에서 후원이라 불러왔다. 후원은 엄밀히 말해 창덕궁의 후원이지만 이 후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창덕궁과 창경궁의 뒤쪽이 되어 자연히 두 궁궐에서 공유하고 있다. 후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인 태종 때부터이다. 《왕조실록》 태종 6년(1406) 4월에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慍亭)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온정 앞에는 연못이 있어 잔치를 벌이고 등(燈) 놀이를 하였는데, 태종 14년(1414)에 신독정(愼獨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태종 6년(1406).. 2020.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