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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정조의 업적3

by 무님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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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장각 설치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유교()·선보()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 갔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의 건의로 일시 설치되었으나 폐지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세조가 친히 쓴 ‘(규장각)’이라는 액자를 종정시()의 환장각()에 봉안하고 역대 국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설립되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하였다.”고 설각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창설한 뒤 우선 영조의 어필·어제를 봉안하는 각을 창덕궁 내에 세워 봉모당()에 모시고, 사무 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였다.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병합해 외각으로 했고, 활자를 새로이 만들어 관리를 맡는 일과 편서·간서를 내각에 맡겼다.

1781년에 청사를 모든 관청 중 가장 광활하다는 옛 도총부() 청사로 옮겼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해 강도외각()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서고(西 : 조선본 보관)·열고관( : 중국본 보관)·개유와( : 중국관 보관) 등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 보관하게 하였다.

장서는 청나라에서 구입한 1만여 권의 고금도서집성()을 포함, 약 8만여 권을 헤아렸다. 이것이 현재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 도서의 원류이다. 규장각의 주합루()는 당조()의 어필(어진)·인장 등을 보관하며, 봉모당은 열조의 어필·어제 등을 봉안하였다.

열고관·개유와는 내각과 함께 서고로서, 이문원은 사무 청사의 구실을 하였다. 구교서관()은 외각과 열조의 어제·서적 등을 보관하는 강도외각()으로 구성되었다.

관원으로 제학 2인, 직제학 2인, 직각() 1인, 대교() 1인 외에 검서관() 4인이 있었다. 각신들은 삼사보다도 오히려 청요직()으로 인정되었다. 종1품으로부터 참하관에 이르는 노소 6인과 실무담당으로 검서관 4인을 두었다.

내각에는 검서관 외에 사자관 8인 등이 있었고, 다시 이속으로 70인이 있었으며, 외각에도 이속 20여 인을 두었다. 규모도 1781년까지 계속 정비되어갔는데,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개유와()’라는 서고를 증축하기도 하였다.

규장각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어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특히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매월 두 차례씩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따라서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규장각의 도서 출판의 기능을 위해 예조 소속의 출판 전단 관서이던 교서관을 규장각의 속사()로 삼고, 정유자(, 1777년), 한구자(, 1782년), 생생자(, 1792년), 정리자(, 1795년)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간행하였다.

많은 양의 국내외 도서가 수집·간행됨에 따라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첫 번째 분류 목록은 1781년(정조 5) 약 3만여 권의 중국 책을 대상으로 서호수()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를 ≪규장총목 ≫이라 하며 이것이 오늘날 규장각도서의 시원()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책들만을 분류한 것이 ≪누판고 ≫와 ≪ 군서표기≫이다.

각신들의 권한으로 시신()은 승지 이상으로 대우를 받아 당직을 하면 아침 저녁으로 왕에게 문안했으며, 신하와 왕이 대화할 때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특히, 1781년부터는 일기를 기록해 ≪내각일력 )≫이라 했는데, ≪승정원일기≫ 이상으로 상세하였다. 또한, 2년 뒤부터는 각신이 매일의 정령형상() 등을 기록, 왕이 친히 첨삭한 뒤에 등사하였다.

1779년에는 새로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출신 임과()로 했는데, 국초 이래로 재주와 학문은 뛰어나도 입신의 길이 막혀 있었던 서얼들에게는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또, 당하관의 소장관원 중 우수한 자로 뽑힌 초계문신()에게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치러 상벌을 내렸다.

각신은 초계문신 강제()에 시관이 되어 일대의 문운을 좌우하였다. 또 실질적인 경연관()으로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설립 이후 그대로 존속되어오던 규장각은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옮겨지고 소장도서들도 이문원·집옥재()·시강원 등에 분산, 보관되었다.

 

 

 

2. 초계문신제 실행

정조는 즉위하자 ‘계지술사숭유중도()’라는 시정방침과 ‘계지술사’의 기치 아래 자신의 세력 기반 내지 문화 정책의 추진 기관으로서 규장각을 내세웠다.

세조 때 발의되고 숙종 때 종정시()에 부설하여 여러 선왕들의 어제()·어서()를 봉안하던 소규모의 도서관 성격의 규장각을 국가 권력의 핵심 기관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37세 이하의 참상·참하의 당하관 중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초선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 양성의 장치를 강구한 것이 초계문신 제도이다.

이 제도의 법적 근거는 ≪경국대전≫ 예전() 장권조()의 ‘월과문신()’ 내지는 ‘전경문신()’에 두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 사가독서() 제도나 독서당(, 일명 ) 제도를 시대에 맞게 재편제한 것이다.

교육 과정은 과강()·과제()의 강제()가 주축이다. 전자는 매달 15일 전과 20일 후 두 번 행해졌고, 후자는 20일 후에 한번 실시되었다. 정조가 직접 교육에 임하는 친강()은 매달 20일경에 적당한 날을 잡아 거행하고, 왕이 직접 시험을 보이는 친시()는 매달 초하루에 행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학문을 독려하고 인간적 접촉을 시도하였으며, 결국 친위 세력으로 포섭하였다.

1년 중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에는 집에서 글을 지어 바치는 규정을 두어 학문 정진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대학≫을 우선으로 하는 사서삼경()의 성리학적 칠서()가 주요 교과로 채택된 것은 전대와 다름없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 성리학의 말폐 현상인 심성론()에 대한 지나친 공리공담()을 배제하고, 과문()을 위한 사장학()을 견제하여 구두()보다는 문의()에 치중하여 경전의 참뜻을 궁구하도록 하였다.

1781년(정조 5) 시작되어 1800년 정조가 죽을 때까지 10차에 걸쳐 138인이 배출되었다. 그 뒤 중단되었다가 1848년(헌종 14)에 다시 시작, 2회에 56인을 뽑았다. 모두 12선()에 174인이 초계되어 재교육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전반 공경대부의 태반이 이들 초계문신 출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의 시기에 있어서 초계문신 출신 관료들의 비중과 활동을 알 수 있다.

 

3. 숭렬전 설치

인조 대에 남한산성에 건립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온조왕사(溫祚王祠)에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 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숭렬전은 팔전 중 하나로 이렇게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국가가 정식으로 받들게 되었다. 

 

 

4. 서체반정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개혁 정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시기 즈음 되면 그 당시의 남성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양난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잡는다.

 

 

 

5.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

문체반정의 연장선상에서 정조는 아예 밀려드는 고증학 등의 "이단사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모아 편집, 출간, 보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주자대전집을 통해 이단사설들로부터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서형수에게 명하여 사고전서 도입 문제와 더불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원본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주자학의 근본이 되던 이 책들은 판본들이 다양했는데 정조는 원본이자 정본을 가져올 것을 명한 것이었다.
서형수는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자이자 당대 청의 대학자 기윤을 찾아가 사고전서 도입 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자의 저작물 정본에 대해 문의했고, 기윤은 이후 사신편에 들려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정본을 보내주었다. 서형수는 이 약속을 받은 후 주자대전, 주자어류 이외의 주자의 저작물을 찾기도 한 후 귀국해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정조가 이후 사망하면서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조의 노력은 그가 사실상 성리학 유일론자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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